요한일서 1:3 사귐의 기도 4
사귐의 기도 4
요한일서 1:3절 2018/06/13(수)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기도 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①구하고 ②찾고 ③두드려야 합니다.
바로 성령을 모시고, 그와 연합하며, 일치하기 위해 ①구하고 ②찾고 ③두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①성령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있고(구원의 길, 내적 순례의 여정, Inward Journey),
②성령을 통해서만 그분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기(성화의 길, 외적 순례의 여정, Outward Journey) 때문입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만나 사귀거나, 그분의 성품을 닮아갈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은총의 수단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초점은 항상 하나님 그분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위 우리가 말하는 ‘기도제목’을 보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것’(마6:33)안에 속하지 않은 것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니 ‘피정 避靜 retreat’, 잠시 ‘물러나’ 성령의 검증, 성서의 검증을 받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자신이나 신앙공동체에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 19편입니다.
19: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9: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또는 ‘죄에 빠지지 않게 하여주소서.’)
19:13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주시고 그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9:14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야훼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개역개정: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 자는 기도(①구하라 ②찾으라 ③두드리라)할 때 항상 다음과 같은 것을 늘 점검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대할 때, 아버지가 들고 있는 선물 꾸러미에 관심을 두는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에게만 관심을 두는가?
- 기도의 초점은 선물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 기도는 ‘요청(청원)’ 보다는 하나님과의 ‘대면’이요 ‘사귐’이다.
- 사귐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지속성
2) 상호성
3) 애정이 전재되어야 한다.
4) 정적에서 동적으로...
5)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공감의 능력이 늘어난다.
-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다.
- 기도는 침묵(묵상) 속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로 시작해야 한다.
- 바른 기도를 하려는 사람은 변화(Lord, do it.)에 대해 마음을 여는 용기 를 가져야한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줄거리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이어서 두 번째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는가?’
종종 우리는 이런 문구를 만나게 됩니다.
‘기도는 만사萬事를 변화시킨다.’
일견 힘차게 보이는 이 구호는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기도신학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본질을 상당히 왜곡할 수 있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변화의 대상은 만사萬事가 아니라 성령을 보혜사로 모시고 살아가는 나 자신(自我 ego)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自我 ego)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죄(거짓, 불의, 교만, 오만, 자랑 등)와 육체의 연약함(옛사람의 습관)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아들딸인 ‘참된 나(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나)’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내 편’에서 변화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묻고 성령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올바를 기도의 방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 그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뜻, 그리고 그분이 옳다 여기는 것을 우선 살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살펴야 할 것은 변화의 주체이자 응답의 주체인 ‘나 자신’입니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 안에서 ‘나’를 찾아야 합니다.
만사가 변화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나는 그대로 있으면서 만사가 변화되기만을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응답이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응답이 되더라도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오는 유혹이요 시험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나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내가 참되게 변화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무디((Dwight Moody)의 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보다 나 자신에게서 더 많은 문제를 본다.’
하지만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그런 삶의 방법을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도에 앞서 꼭 거쳐야할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쓰거나 묵상하거나, 또는 선포되는 설교를 통하여 듣거나, 거룩한 독서를 하거나, 신앙의 도움이 되는 책을 탐독하거나, 찬양이나 음악을 듣는 여러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합니다.
이왕이면 그런 시간을 많이 마련해야합니다. 아주 의도적으로...
하지만 이것도 막상 해 보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음성 듣기’가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에 오해도 많고 탈도 참 많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처럼 육신의 일 즉 육신의 귀로 듣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분의 말씀 또한 육신의 귀로 들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성령이 조명하시는 깨달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음의 청력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묵묵히 앉아 우리의 영을 집중시키고 있으면,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하나님의 말씀 ‘레마 ρημα’ 입니다. 기도는 이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기도 자는 깨달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시각에서 생각하게 되고, 바라보게 되며, 행동하는 방식을 익히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혀 불변할 것 같은 삶의 변화를 희망하게 되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까지 변화시키는 기대를 품게 됩니다.
바른 기도로써 내가 변화되면, 그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물론 가장 맑은 거울은 하나님 자신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청정한 영성(시92:14)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추는 작은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시92:13 우리 야훼의 집안에 심어진 자들아, 하느님의 뜰에 뿌리를 내리고 우거지거라.
92:14 늙어도 여전히 열매 맺으며 물기 또한 마르지 말고 항상 푸르러라.
92:15 그리하여 나의 반석이신 야훼께서 굽은 데 없이 올바르심을 널리 알려라.
또한 ‘변화 된 나의 행실’은 ‘세상의 소금과 빛’ 그리고 ‘등경 위에서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삶이 변화되면, 그 아름다음을 어둠이 감출 수 없고, 그 변화 된 삶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비추는 생명의 등불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5:15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5:16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처럼 ‘변화 된 나의 행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다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취해야할 행동은 낮아짐, ‘종의 영성(Servant Divinity)’입니다.
눅17:9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7:10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Lord, do it.)' 하고 말하여라."
하지만 삶의 현장은 항상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맑은 거울 앞에서 또는 청정한 영성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간파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3: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3: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3: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진리를 통해 참된 삶에 가까이 갈수록 이 세상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악한 삶의 실상이 우리의 모습과 대조되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한 기도 자를 두려워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희생된 이가 순교자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덧없는 희생이지만 그것은 세상을 구하는 값진 희생입니다. 고대 교회의 지도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말입니다.
‘순교는 교회의 씨’
다시 강조합니다. 기도는 만사가 아니라 내가 바뀌고 변화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