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 1:10-14 방관에서 긍휼로
방관에서 긍휼로
오바댜 1:10-14절 2018/06/01(금)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1: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14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나 바벨론보다 이스라엘을 더 힘들게 한 민족이 등장합니다. 어느 민족입니까?(1:10절에 그 힌트가 나옵니다) 에돔 족속입니다.
창세기 25장 30절입니다.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에서의 별명인 에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방금 읽은 창세기 25장 30절에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붉다’라는 뜻입니다.
‘붉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 또 누가 있습니까?
아담입니다.
아담 역시 ‘붉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돔’ ‘아담’, 발음이 서로 비슷하게 된 것입니다.
‘에돔’의 원래 이름은 ‘에서’입니다. 야곱의 쌍둥이 형이지요.
그런데 그 관계가 아주 불편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창세기 25장에 나옵니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예언의 말씀처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나뉜 두 민족, 즉 에돔과 이스라엘은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불편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지요.
먼저 가시가 된 것은 동생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에게 큰 상처를 준 사건이 사무엘하 8장에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자마다 제일 먼저 치른 전쟁이 염곡, 곧 소금골짜기에서 치려진 에돔과의 전쟁입니다.
그 때 다윗의 군대가 에돔 사람 몇 명을 죽이는가 하면, 만팔천명을 죽입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을 학살하지요.
그리고 그곳에 이스라엘 정예군을 주둔시키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식민 지배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향한 특히 다윗 왕가를 향한 에돔 사람들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지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다윗 왕이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 25장의 예언을 이룬 것이지만 반대로, 에서의 후예인 에돔의 입장에서는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이 이렇게 무리수를 둔 데에는 두 가지의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에돔 땅에 있는 항구 도시(아카바 만)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사해와 홍해 사이 저지대에 풍부한 지하자원 특히, 철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찌되었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창25:23절의 예언에 따라 에돔이 이스라엘에 의해 식민 지배를 당하다가 분열 왕국 시대인 유다 왕 여호람 때 가서야 독립하게 됩니다.
그렇게 약 400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국제정세가 바뀌자 유대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큰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신흥강국 바벨론 제국이 처 들어 온 것입니다.
그 전쟁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 됩니다. 완전 박살나지요.
하지만 예루살렘과 달리 에돔 성읍은 천연적 요새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 위기로부터 벗어납니다.
바벨론 제국의 침공을 피하지요.
그때 망한 이스라엘을 향해 에돔이 어떻게 처신했을까요? 미우나 고우나 형제인데, 어려움에 처한 형제의 나라 이스라엘을 돕겠습니까? 아니면 방관자가 되겠습니까? 에돔의 선택.
방관자를 넘어 아예 망한 이스라엘을 뭉개 버립니다.
옵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바벨론)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대로 그동안 받은 설움을 되로 받고 말로 갚아 줍니다. 아주 통쾌하게 갚아주지요.
하지만 에돔의 행위를 하나님이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시던 하나님이 드디어 입을 엽니다.
선지자 오바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다시 10절입니다.
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1:10 한 동기인 야곱의 후손을 무참히 죽인 죄로 너희는 치욕을 당하고, 영영 망하게 되었다.
첫째 치욕을 당하다가
둘째 아주 망하게 되었다는 아주 무서운 저주의 심판을 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저버린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의 형제인 북한, 이 북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입니다.
미국 사람들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갈 것인가? 그래서 악을 악으로 갚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동기간인데, 형제인데, 속는 셈 치고 다시 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있다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요.
‘악을 악으로 갚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트럼프가 선택한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는 용서이고, 조건 없는 화해이고, 조건 없이 돕는 것이지요.
바로 하나님처럼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옵1:12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 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 1:13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내 백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만은 그 재앙을 보며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그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어야 했다. 1:14 도망가는 이들을 죽이려고, 갈라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 받던 그 날, 너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어야 했다." 형제의 재앙, 형제의 멸망, 형제의 몰락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다른 신과 다른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백성, 그 자녀 됨의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향한 사랑
바로 긍휼과 자비의 계명을 목숨처럼 여기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일 오후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비유에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돼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제사장? 아닙니다.
레위인? 역시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일까?’
바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설사 그가 유대인의 의해 개돼지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비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자비를 베푸는 행위가 없으면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제사장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구원론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살 길을 찾아 가는 북한, 불쌍히 여기십시오.
누구처럼 일이 튀 틀려지기를 바라지 말고, 조용히 응원하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것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감성입니다.
공감의 능력이지요.
특히, 고난과 시련 속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은 도움이 가슴 깊이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고난과 시련 때 받는 냉대와 멸시는 평생 잊지 못할 큰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주 큰 분노가 되지요.
그러니 지금 내 형제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에 방관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처럼 긍휼과 자비로 풀어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살 길이 보입니다.
에서(털복숭이)→에돔(붉다, 땅의 흙)
에서(에돔)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이 부여한 장자 권을 야곱에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야곱이 형과 거래하던 음식을 팥죽이라고 부르지 않았다(창 25:29,30). 단지 '붉은 것(죽)'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물론 독자들에게 번역자가 그 '붉은 것(죽)' 친절하게 25:34절에서 팥죽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죽의 본디 이름은 '코올(kool)‘이다.
코올은 여러 종류의 곡식을 절구에 빻아서 만든 음식으로 유대인이 즐겨 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로 코올 가운데서도 붉은 코올은 유대인들이 가장 낮게 치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터무니없는 거래를 붉은 코올에 비유하기도 한다. 에서는 팥죽이 아니라 이 볼품없는 붉은 코올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고 말았다.
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다쉬'(עדש)이다.
오늘날 렌즈콩으로 추정하는데 근동지방에서 쉽게 재배되는 콩이다.
그 모양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콩이나 팥 모양이 아니라 고추씨처럼 생겼는데 더 통통하다.
색깔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팥처럼 아주 진한 붉은 색이 아니라 오랜지 색에 가까운 밝은 붉은 색이다.
* 이 본문이 주는 핵심은 에서가 하나님의 축복인 장자의 명분(상속권)을 우습게 여기고 하찮은 ‘붉은 것’을 취해 ‘에돔(붉다, 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세기 2장 7절 ‘생령의 사람’ 이전 곧 ‘땅의 흙의 사람’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번역
25:29 하루는 에사오가 허기져 들에서 돌아와 보니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25:30 에사오가 야곱에게 "배고파 죽겠다. 그 붉은 죽 좀 먹자." 하였다. 그의 이름을 1)에돔이라고도 부르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에돔"은 '붉다'는 히브리어 "아돔"과 비슷하다.)
25:31 야곱이 형에게 당장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하자
25:32 에사오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였다.
25:33 그러나 야곱은, 먼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쳐 요구하였다. 에사오는 맹세하고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
25:34 그리고 에사오는 야곱에게서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은 후에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