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3-8 아름다운 유산
아름다운 유산
디모데후서 1:3-8절 2018/05/13 부활절 7주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부활절 7주이면서 한국교회가 정한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주일
언제부터 이날을 기념하고 지켰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한국감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신앙의 유산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유산이자 신앙의 위대한 가치이지요.
지난 목요일이었습니다.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줄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침몰한 세월호의 직립, 다시 세움입니다.
세월호의 직립, 다시 세움
이것은 어떤 이들의 말처럼 돈 낭비 세금낭비 일수도 있습니다.
또 쓸데없는 짓에 국가가 힘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년실업이 역사상 최고점을 찍고, 소상공인의 매출이 급감하고 있으며, 가계의 수입이 멈추다 못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 절박한 위기상황 속에서 나라가 과거에 사로잡혀 많은 백성의 끼니를 등한 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생각이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우리가 부활의 은총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세월호의 직립, 세월호의 다시 세움을 돈 낭비 세금낭비 시간낭비 국가적 손실로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의 직립.
무참하리만큼 어느 곳 하나 성한 곳 없는 그 배가 세워지면서 생각나는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질정叱正이라는 단어입니다.
질정叱正.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맘몬에 사로잡혀 생명을 돈으로만 계산하고 환산하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질정이지요.
하나님의 꾸짖음이고, 하나님의 바로잡는 이지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은 생명을 죽이고, 생명을 파괴하고, 생멸을 유린하는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 하나님의 거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뻘 속에 파묻혀도 좋을 만큼 그렇게 막 다룰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다시사심, 그리스도의 일어나심은
희망이자 용기이자 다시 일어나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원음대로 발음하면 ‘예샤야후’이지요.
‘예샤(예수)’라는 말과 ‘야후’라는 말이 합한 단어입니다.
그 뜻을 우리말로 풀면, ‘야훼께서 구원하신다.’가 됩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하지만 이사야의 현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구원은커녕 민족의 패망, 나라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 때,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선지자 이사야에게 심어준 하나님의 비전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19장 19절입니다.
19:19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19:19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복판에 야훼를 섬기는 제단이 서겠고 그 국경선 가까이에는 야훼의 주권을 표시하는 돌기둥이 서리라.
이집트 땅 한복판에 세워진 제단 하나, 그리고 국경선 가까이에 세워진 야훼의 주권을 표시하는 돌기둥 하나,
어쩌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제단 하나, 정말 아무것도 아닌 돌기둥 하나 일 것입니다.
하지만 새날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희망의 징표이자 은총의 표시이자 다시 올곧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처럼,
세월호의 직립 역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줄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징표이자 은총의 표시이자 다시 올곧게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생명의 가치를 그 신앙의 위대한 유산을 우리 교회가 버리고 ‘돈돈’ 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을 것이고, 교회를 향한 세상의 기대 역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난 8년 동안 감리교인의 교세가 25만 줄어 20년 전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 보다 더 큰 아픔과 절망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이 시대의 경고, 꾸짖음과 바로 잡음을 세월호의 직립을 통해 보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유산’하면 생각나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찬송가 199장입니다.
1.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 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런 아름다운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어머니 아버지를 전도했기 때문에 저는 이런 아름다운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기억을 가진 분들이 제일 부럽습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손때 묻는 성경을 자랑하는 이들이 저는 가장 부럽습니다.
그 가치, 그 신앙의 유산을 귀하기 여기는 후손을 볼 때마다 아주 부러워서 미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희망을 두는 것은 4절 두 번째 단락입니다.
4.그때 일은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님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
비록 남들처럼 어머니의 말씀, 부모님의 성경책을 유산으로 받지는 못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 건우 건민이의 유일한 유산이 되기를 저는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제가 이 말씀에 붙들려 치열하게 몸부림 쳤던 그 흔적들을 우리 자녀들인 건우 건민 이가 잊지 않고, 우리 자녀 세대에도 그리고 그 다음세대에도 쭉 이어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점포 하나 없이 평생 장사하신 분입니다.
계란장사, 잡곡장사, 야채장사 등...
요즈음은 점포 없이 장사 하는 분들을 무점포 상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냥 노점상이지요.
항상 단속의 대상이었던 불법 노점상이 저희 어머니의 평생 일터였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꿈꾸던 것이 자그마한 점포 하나였습니다.
행여 띠어 온 물건이 다칠까 바 늘 노침초사하며 살아가는 어머니의 맘을 편하게 해 드릴 점포하나 사 드리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자기 땅 한 평 없이 평생 농사를 지은 농사꾼입니다.
소작농이지요.
농사를 짓는 것인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모를 정도로 경계가 늘 불분명했지만 어찌되었든 남의 땅을 빌려 평생 소작농으로 사신 분이 저의 아버지입니다.
돌아가실 때도 남의 땅에서 농사짓다 남의 밭에서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미 돌아가셨는데도 그 밭을 사서 아버지에게 드리고 싶은 것이 제 굴뚝같은 마음입니다.
오기가 나서 꼭 그렇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처럼 저는 부모로부터 신앙도 재물도 물러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유일하게 물려받은 유산 하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유산이 오늘 읽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찾아보시지요?
그렇습니다.
1장 3절에 기록된 청결한 양심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것을 깨끗한 양심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부끄럽지 않은 깨끗한 양심입니다.
이것이 제가 저희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러 받은 유일한 유산입니다.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깨끗한 양심
이 유산이 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명예를 얻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때로는 몹시 불편하고 아주 힘듭니다.
줄게 없어 기껏 남기신 것이 깨끗한 양심, 착한 성품일까?
‘고씨 참 착했지!!!’
어떨 때는 짜증이 확 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는 청결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아름다운 유산으로 주신 부모님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고씨 참 착했지!!!’
이 한 미다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부모 공경을 명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십계명 중에 다섯 번째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공동번역)
20: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단순히 잘 봉양하라는 말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잘 봉양해 그려야지요.
자주 찾아뵙고, 용돈도 드리고, 맛난 것도 사 드리고, 보약도 해 드리고, 좋은 옷도 사 드리고, 여행도 보내드리고, 또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는 남자 친구를, 홀로 계신 아버지에게는 여자 친구를 만들어 드리는 것도 해야 하겠지만 제일 큰 부모 봉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첫째, ‘생명의 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전달자'인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섯 번째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의 참 뜻입니다.
생명의 원 주인이신 하나님과 생명의 전달자인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부모를 공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으로요?
하나님이 주신 깨끗한 양심, 정결한 양심으로...
바울이 2차전도 여행 중에 다시 찾아 간 도시가 ‘루스드라’입니다.
1차전도 여행 때, 발을 못 쓰는 사람을 일으키는 이적을 베풀었던 도시이지요. 그곳에서 만나 사람이 바로 디모데입니다.
루스드라와 인근 지방인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에게까지 깨끗한 양심으로 이미 호평이 자자했던 인물,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
디모데
그의 어머니는 신실한 유대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양심과 신실함을 알아 본 사도 바울은 동역하다가 도망친 마가 요한 자리에 디모데를 집어넣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이후 디모데는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에 사람을 보낼 때 마다 가장 믿음직한 디모데를 꼭 동행해서 보냅니다.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디모데의 이름을 공동 발신자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만큼 디모데는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디모데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입니다.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흥미로운 것은 사도 바울로부터 칭찬 받은 디모데의 믿음. 그 거짓 없는 믿음의 배경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 인데, 1장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1:5 나는 그대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또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도 지금 그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어떻습니까?
부럽지 않습니까?
앞서 언급했지만 제가 제일 부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
믿음으로 간직할 만한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그 유산을 디모데가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습니까?
거짓 없는 믿음,
바로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깨끗한 양심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자녀에게, 손주에게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여러분의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에 달려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하십시오.
오늘 말씀이 주는 도전입니다.
공1:6 그래서 나는 다시 그대를 깨우쳐줍니다. 내가 그대에게 안수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시오.
1:7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
1:8 그러므로 그대가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이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죄수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