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1-18 춤의 왕
춤의 왕
요한복음 20:11-18절 2018/04/01 부활주일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은 2013년 부활주일 설교를 재구성한 것으로 ‘춤의 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부활절을 상징하는 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백합화입니다.
부활절 무렵에 피어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부활백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반면 천주교회에서 백합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상징합니다.
아마도 동정 곧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순결한 이미지와 가장 가깝다고 여겨서 그런지, 그들은 백합성모라고 부릅니다.
우리와 다르지요.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으로 백합화를 선택한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부활의 영광을 뜻하는 빛나는 흰 색 때문입니다.
강단보, 무슨 색으로 갈아입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광, 승리, 빛을 뜻하는 흰색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이지요.
둘째, 부활을 상징하는 꽃으로 백합화를 선택한 이유는
우아하면서도 힘차게 뻗어나가는 백합의 자태 때문입니다.
빛의 기운이, 생명의 기운이 그리고 희망의 기운이 우아하면서도 힘차게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부활절을 상징하는 꽃으로 백합화를 선택한 이유는 백합화의 향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섬김의 향기, 기쁨의 향기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이미지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으로 백합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부활.
몸의 부활이라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잘 설명한 분은 놀랍게도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보낸 갈릴리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누구일까요?
길리기아 지방 다소 출신의 바울 사도였습니다.
아이러니하죠.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5: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5:16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몸의 부활이라는 부활의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의 특징을 바울 사도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첫째, 몸의 부활이라는 부활의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 전처럼 (이 전의 삶의 방식, 이 전의 가치관처럼) 육신의 잣대 곧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표준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후5:16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돈과 힘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사는 현실 속에서 그렇게 살다가는 바보, 멍청이 소리 듣기에 딱 좋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전처럼 다시 말해 부활의 새 생명을 얻기 전처럼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표준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표준대로 살아갔던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 향한 권면이었고, 또한 그러한 도전 앞에 서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보낸 권면임을 잊지 마십시오.
제발, 그리스도를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표준, 그 기준 대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뜻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몸의 부활이라는 부활의 생명을 맛 본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의 표준, 모든 것의 잣대, 모든 것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이지요.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그 ‘누구든지’의 주인공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지 전에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목격하고,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성경이 지목하는 분, 누구입니까?
막달라 사람 마리아입니다.
아람어 ‘막달라’란 망대를 뜻하는 말로, 갈릴리 서쪽 망대가 있는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입니다.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아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해서 일곱 귀신 들린 여자, 가장 천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주인공으로 기록되었을까?
막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왜 이런 여인에게 부활의 몸을 제일 먼저 보이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린다면,
적어도 막달라 마리아는 육신의 잣대, 즉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표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았고,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가장 천한 여인이었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사랑했던 예수님처럼 막달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잣대,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표준에 메이지 않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부활의 몸을 보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그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담고 있지요.
마침 좋은 소식은 3월 28일부터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이라는 영화가 메가박스 송도에서 지금 상영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소식은 오늘 오후 2시 10분이 마지 막 상영이라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찾아서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정성껏 마련한 향품을 가지고 막달라 마리아는 홀로 무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가는 네네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걱정은 예수님의 무덤을 가로 막고 있는 무거운 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무슨 재주로 그 무거운 돌문을 굴리지’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뜻밖에도 무덤 문이 이미 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있어야할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황스럽지요.
그리고 곧장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장사한 후에는 장정 2-3 사람이 힘을 써야만 움직일 수 있는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봉인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 무덤 문이 열려있고, 있어야할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허둥지둥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목격한 사실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놀라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 아마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일 것입니다. 이 두 제자가 먼저 무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이미 턱까지에 찼지만 마리아도 그들 뒤를 따라 무덤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무덤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베드로보다 젊었던 요한이 무덤에 제일 먼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베드로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먼저 무덤 안을 자세히 살핍니다.
역시 마리아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 때 요한에 이어 가분 숨을 내시며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베드로도 알게 됩니다.
시체를 감 샀던 삼베와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남아 있는데, 정작 있어야할 예수님의 시신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상황을 이렇게 꼬집어 이야기 합니다.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던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도둑맞았다.’
이런 결론을 내린 두 제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의 시체를 찾지 않고서는 차마 돌아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 한 가지, 눈물을 흐리며 우는 것입니다.
그 때였습니다.
무덤 안에서 이상한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덤 속으로 다시 들어간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먼저 말을 건넨 것은 천사,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기척이 나더니 동산지기 같은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역시 먼저 말을 걸어오는데 천사들과 똑같이 물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동산지지.
요한은 그가 누구라고 밝힙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하지만 무덤을 관리하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이렇게 묻습니다.
15절 후반부입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 때 낯익은 음성이 드린 것입니다.
일곱 귀신 들었을 때 들었던 낯익은 음성이 드린 것입니다.
16절입니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그것은 분명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모습은 아니었지만 음성과 어조는 분명히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화답합니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랍오니’
‘랍오니’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마리아가 즐겨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드디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부활하신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알아 챈 것입니다.
왜 마리아가 이런 확신을 가진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 말고 자기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준 이가 세상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을 높이 대우하고 다정스럽게 대접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귀신 들렸을 때입니다.
그것도 일곱 귀신이나 들렸을 때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을 사람들이 뭐라고 불렸을 까요?
어떻게 대접했을 까요?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잣대, 육신의 잣대로 마리아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야!” 라는 그 다스한 음성.
그 어조 하나로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마리아가 확실하게 알아차린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부활의 주님, 영광의 주님이 누구에게 찾아오시는가?
그렇습니다.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사람.
육신의 잣대, 세상이 정한 세속적인 표준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
천지간에 홀로 된 것처럼 외로움에 떨고 있는 한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목이 저의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즐겨 불렀던 노래하나 부르는 것으로 갈무리 하겠습니다.
시드니 카터 Sydney Carter(1915-2004)가 1963년에 만들었던 노래 "Lord of the Dance(춤의 왕)입니다.
이중에 제 가슴을 치는 가사는 5절입니다.
“어리석게 그들 좋아 날뛰지만 나는 생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네가 내 안에서 살면 나도 네 안에서 영원히 살련다.”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