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이사야 5:16-21 악은 망합니다

心貧者 2018. 3. 4. 12:34


악은 망합니다

이사야 5:16-21                                      2018/03/02()

5: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5: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

5: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5:19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5: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시편 1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1편 마지막 절을 보시면 우리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 하나가 나옵니다.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은 반듯이 망한다.’

이 원칙만 지켜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악인이 망하지 않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오히려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망합니다.

어제가 삼일절인데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지요.

그러니 억울하지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시편에 등장하는 탄원시들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제발 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입니다.

 

시편이 150편인데, 탄원시가 몇 편정도 나올 것 같습니까?

거의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탄원시가 압도적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불의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이지요.

결코 세상은 착하고 의로운 이들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악한 짓을 하고 못된 짓을 해도 돈 있고 힘 있고 빽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비난과 멸망이 아니라 칭찬과 영광이 주어집니다.

그것도 아주 거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이 어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지 우리가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해프닝이냐 아니면 이성과 상식과 양심의 회복인가?

 

저희 집 앞에 법원이 있습니다.

특히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을 도와주는 변호사 사무실들이 꾀 많습니다.

의뢰인들은 말합니다.

법원이 옳고 그름으로 판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판결의 잣대가 될까?

누가 판결의 최후 승자가 될까?

결국에는 힘 있는 변호사를 쓴 사람이 승소한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 시시비비가 아니라 어떤 변호사를 고용하는가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법원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여인상이 있습니다.

저울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여인상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여인상의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공정한 판단, 공정한 재판을 하겠다는 의지이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우리나라 법원에서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슬픈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입니다.

 

탄원 시 중에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시가 시편 73편입니다.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73:1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73:2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73:3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73: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73:5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73:6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73:7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73:8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73:9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73:10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73:11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73:12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73:13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시편의 서론인 시편 1편에서 하나님이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원칙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시편 73편을 쓴 시인은 한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탄하는 것입니다.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이 어려운 문제 어떻게 풀까요?

선지자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의 해법을 제시합니다.

 

첫째,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정의롭고 공의롭다그러니 기다려보라는 것입니다.

5: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여기서 정의로 번역 된 히브리어 단어는 미슈팟(mishpat)’입니다.

법에 따라 판단하는 사법적 정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없는 사법적 정의이지요.

 

반면 공의로 번역 된 히브리어는 쩨다카(tzedakah)’입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말로 반드시 모든 이들에게 회복되어야할 하나님의 정의정도로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조롱합니다.

5:19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좋은 번역이지만 이해가 좀 어려워서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더러 서두르시라고 하여라.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공의 정의)을 빨리 하시라고 하여라. 그래야 우리가 볼 게 아니냐. 계획을 빨리 이루시라고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세우신 계획이 빨리 이루어져야 우리가 그것을 알 게 아니냐!’

 

지금 우리 교회가 이 조롱을 듣고 있습니다.

도대체 공의롭고 정의롭다고 하는 너희 하나님은 지금 뭐하고 계시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한 말씀이 516절입니다.

이번에는 새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5:16 ‘그러나 만군의 주님께서는 공평하셔서 높임을 받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거룩하신 분으로 기림을 받으실날이 곧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둘째, 억울한 이들을 돌보시는 그 때를 기다려 보라는 것입니다.

5: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

 

이 뿐만 아닙니다.

셋째, 악인은 반드시 망하니 기다려 보라는 것입니다.

5: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러니 알량한 지혜, 알량한 명철, 알량한 양심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을 대리하는 심판자가 되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또한 역시) 화 있을진저

심판은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살다보면 가끔 이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생기는 실수인데 바로 심판에 대한 조급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그 즉시 칼을 들고 불의와 맞섰던 베드로처럼 정의 칼, 공의의 칼을 빼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의 이름으로, 그리고 공의의 이름으로 칼을 들지요.

 

그 때 우리 주님이 뼈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2652절인데, 두 가지입니다.

첫째,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둘째,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손 놓고 있을까?

아닙니다.

다시 오늘 본문 516절로 돌아가 그 곳에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5: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날과 그 때를 믿고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악이 망하고 정의로우신 여호와가 높임을 받을 때까지,

거짓이 망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을 때까지,

믿고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의 자리로 소금처럼 빛처럼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와 사망을 이긴 부활신앙임을 잊지 말고, 그 쓰임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