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9장 12-13 공감하며 소통하며

心貧者 2018. 2. 6. 10:49


공감하며 소통하며

마태복음 912-132018/02/02()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평창올림픽과 함께 떠오르는 기술이 하나 있습니다.

‘5G 기술입니다.

‘5G’ 그 기술이 어떤 것이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4G’ 기술보다 더 많은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그리고 안전하게,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서비스를 위한 요금도 덩달아 상승하겠지요.

 

또 하나 화두가 되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중에 하나인 AI 기술입니다.

이것 역시 지식과 기술과 문화와 역사의 경계를 허무는 공감의 기술로 많은 정보빠른 시간 안에 누구나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둘 다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과 세상을 잇는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잇는 그리고 문화와 문화를 잇는 소통의 도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지요.

60년대 70년대 유일한 소통의 도구였던 한국교회가 지금은 아주 척박한 불통의 도그마에 빠지고 말았지요.

미래 세대인 우리의 아이를 교회에 맡긴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접근합니다.

하나는 세상과 공감하는 능력, 공감의 상실이고,

또 하나는 세상과 소통하는 기술, 소통의 부재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마태입니다.

세리 마태이지요.

당시 시대적 배경을 좀 알고 있다면, 가장 기준미달인 예수님의 제자가 마태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기준미달, 자격미달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마태 같은 인물을 제자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태.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을 가진 이름의 소유자이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인물입니다.

선물은 고사하고 동족의 혈세를 등쳐먹고 살던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태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 모두가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억세기로 소문난 무지랭이 어부들이 대부분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가진 반듯한 인물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의리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충성도, 제로이지요.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베드로인데 그 역시 그날 밤 배신의 아이콘이 됩니다.

 

그런데요.

그저 그렇고 그런 인물들만 한데 모아놓고 자기의 제자라고 우리 예수님이 아주 끔찍이 챙기셨다는 사실입니다.

더 흥미롭고 희한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전도의 역사가 이런 찌질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이런 찌질이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일까요?

그 이유를 가장 상세하게 보도하는 본문이 바로 마태복음 9장입니다.

99절 이후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세리 마태 앞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자마자 대뜸하신 말씀이 나를 따르라

이 명령도 황당하지만 마태가 지금 어디 앉아 있을 때 이 말씀을 하십니까?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저 같으면 절대 이렇게 못합니다.

그런데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세리 마태에게 말을 거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런 후 이어서 하신 말씀이 아주 유명한 선지자의 말씀을 재인용하십니다.

호세아 66절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같은 맥락에서 사무엘이 고집불통 사울에게 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항목하나가 나옵니다.

제사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사무엘상 1522절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행하는 순종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메카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채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건물을 하나 지어놓고 성전, 성전 한다는 것은 글쎄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긍휼이지요.

그 긍휼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배울까요?

 

오늘 본문이후에 나오는 이야기 18절 이후를 보십시오.

어떤 이야기가 주로 나옵니까?

곳곳에서 치유의 기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34절까지 보시면 예수님이 아주 바쁘게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이어서 나옵니다.

 

그런 후 35절로 넘어가면 이제까지의 자신의 사역을 요약하시면서 36절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왜냐하면)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배우라고 하신 긍휼, 공감의 능력입니다.

아픔에 대한 공감

슬픔에 대한 공감

절망에 대한 공감

그리고 고난 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공감의 능력입니다.

아주 진실하게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공감이지요.

 

936불쌍히 여긴다.’는 말과 913절에 나온 긍휼이라는 단어는 같은 말입니다.

번역을 다르게 한 것이지요.

같은 단어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쯧쯧쯧‘ ’그저 가슴 아프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기집’, ‘자궁이라는 뜻의 라쿰에서 파생된 단어가 긍휼인데, 풀어 설명하면 아기집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약한 자, 가난한자,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소외된 자들을 만날 때 마다 그런 아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세관에 혼자 앉아 있는 마태의 아픔을 보셨고

갈릴리 호수에서 착취당하는 어부들의 절망을 보셨고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님이 이 약함을 이 어그러짐을 회복하고 치유하고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9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3,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요즈음 언제 고난 받는 이웃으로 인해 가슴 아리듯 아팠던 적이 있습니까?

가물가물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주님이 원하는 긍휼은 없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처럼 우리 주님이 원하지 않는 제사만 드리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하시는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 고침의 역사가 우리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 공동체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보십시오.

늘 보이던 사람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이제는 그 분의 내면속에 있는 아픔과 연약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왜 그러시는지

무엇을 고민하시는지

왜 아파하는지

왜 방황하는지를 보시고 공감하시고 소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구호 속에 갇힌 우리 교회가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픔을 보고 공감하는 능력.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 그런 분들과 진솔하게 소통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예수님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사랑이며 공감과 소통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그 능력을 배우게 해달라고 이 시간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