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9-12절 주기도문 강해⑭
주기도문 강해⑭
마태복음 6:9-12절 2018/1/10(수)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①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②나라가 임하시오며 ③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①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들을 위한 기도’를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 ‘We Petitions’ 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을 위한 기도’ 또는 ‘우리의 청원들’은 세 가지입니다.
6:11 ①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③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중에서 오늘은 ②죄의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소위 고등 종교라고 부르는 ‘불교’ ‘유교’가 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죄의 근원은 ‘집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핵심 교리 가운데 하나인 ‘사성제四聖諦-고(苦)·집(集)·멸(滅)·도(道)’에 따르면, 인간 마음에 있는 욕심과 무지가 집착을 일으키고, 108개의 집착이 모든 인생의 고통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108개 집착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여러 가지 수행과 금욕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자력구원이지요.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사실, 정치 체제에 더 가깝습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중에서 군君을 강조하는 일종의 통치 수단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들어와 임금(종묘)과 스승(사당, 서원)과 부모(신주)를 섬기는 종교 아닌 종교가 됩니다.
따라서 군사부를 섬기는 5가지 덕목 仁(동:흥인지문)義(서:돈의문)禮(남:숭례문)智(북:숙정문)信(중앙:보신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은 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왕권을 도전하는 대역죄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예禮’에서 벗어나는 이유를 그들은 개인의 욕심(탐욕) 곧 이기심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소小(개인)를 위해 대大(왕권)를 희생하는 것을 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개인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유교가 말하는 구원의 길입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역시 자력구원입니다.
이처럼 엄밀히 따지면, 불교나 유교 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을 배제하는 일종의 철학이자 이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신)에 있습니다.
창조주로 대변되는 ‘엘로힘(하나님)’과 정의로 심판하시는 ‘여호와(야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신)을 배제하고 인간의 존재나 죄를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 원문에는 죄가 단수와 복수로 나뉘어 사용됩니다.
보통 단수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신학적 용어로 ‘원죄’라고 부릅니다.
‘근원으로서의 죄’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원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2장에 잘 그려져 있는 것처럼 위로는 하나님과 사귀고 아래로는 피조물 곧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아주 귀중한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거부하는 곧 대적 자가 되어 낙원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탄의 노예가 되었는데, 이것을 성경은 ‘목이 굳은 백성’이라는 은유로도 표현합니다.
‘목이 굳은 백성’ 곧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거역하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죄가 복수로 사용될 때는 ‘죄들’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 성경에서는 주로 ‘악惡’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떠난 결과 즉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거부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악행들(범죄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에 기록된 악행들(범죄들)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신학적 용어로 ‘자범죄’라고 부르는데 ‘원죄’로 인해 파생된 ‘악(범죄)들’이지요.
문제는 이 ‘죄’ 즉 ‘원죄’이든 ‘자범죄’이든, 이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힘이 인간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죄는 불교나 유교처럼 인간으로부터(집착, 이기심)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나 유교처럼 자력구원自力救援이 아닌 타력구원他力救援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분?(메시아, 그리스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들을 위한 두 번째 청원이
‘6:12 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삶의 기본 조건이자 목숨의 기본 조건이 마련되었다면,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한 행복선언(팔복)을 위한 조건 즉 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청원 속에 죄의 해결을 구하라고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죄(원죄, 자범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용서입니다.
단절 된 관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용서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화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타력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심판 주이신 하나님이 용서하셔야 이루어질 수 있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 속에 들어 간 상태를 우리가 ‘은혜(총)’ 또는 ‘사랑의 빚‘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 ‘은총(혜)’ 또는 ‘사랑의 빚’을 받아들여(영접해서) 다시 하나님 통치(나라, 품) 속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관계의 회복이 믿음이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의 용서를 통해 관계가 회복되는 믿음이 구원의 절대 조건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청원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용서하소서 우리의 빚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랑들을 용서하듯이
여기서 말하는 빚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의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피로 말미암은 하나님 사랑의 빚이지요.
문제는 값싼 구원론이 이 빚의 무게를 약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모든 폐단이 시작되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용서)해 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 잔(선택)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하셨습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그 이유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이 죄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는 회개를 결코 쉬운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죄가 무거울수록 진정한 회개는 십자가를 실제로 지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이제 이 기도문이 주는 몇 가지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 기도는 ‘나 개인의 죄’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의 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문에 ‘우리’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우리 죄를 (우리에게) 사하여 주시옵고’가 됩니다.
이는 나 자신만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를 기도의 으뜸으로 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우리의 연대를 깨닫고 차별 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우리 죄를 (우리에게)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번째 청원을 ‘끔직한 기도’라고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가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죄 사함의 조건으로 거론 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끔직한 기도’가 아닙니다.
먼저 우리말 기도가 주는 오해의 소지를 소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맥상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로 받는 조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거짓 제사장(거짓 사제, 면죄부)처럼 흥정(거래)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큰 오해이고 왜곡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공덕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상(값없이, 대가나 흥정 없이)으로 주어지는 은혜(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조건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대속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아버지의 용서가 나에게 멈추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흐르기를 바라는 다짐이자 결단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용서의 물결을 흘려가게 해 달라는 간절한 청원입니다.
셋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를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절)
② ‘성령을 받으라’(20절)
③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번째 당부입니다.
‘사하면(용서하면)’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는 ‘풀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 묶인 매듭을 푸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용서로써 죄의 매듭을 풀면 풀리고, 용서하지 않으면 죄의 매듭이 그대로 묶여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와 우리 사이의 묶여 있는 매듭들을 안타까워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처럼 이 묶인 매듭을 푸는 자 곧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위해 간구하고 그 길로 우리 삶을 온전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한 두 번째 기도를 주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