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복음 1:29-34절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心貧者 2017. 12. 28. 12:51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한복음 1:29-342017/12/24 대림절 제4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여 년 전부터 한국교회가 유행처럼 따라하고 있는 미국 교회의 성탄절 풍습 하나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영어로 ‘Nativity Scene’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성탄 풍경또는 구유 풍경이라고 부릅니다.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워 경배 받는 풍경이지요.

이것을 교회 입구나 강대상 중앙에 설치합니다.

 

어떤 교회는 실물 크기로 Nativity Scene를 설치하기도 하는데,

해 마다 명동성당에 가시면 가장 그럴듯한 것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밤이나 내일 밤에 청계천, 소공동 롯데백화점, 명동 성당 이렇게 빛을 따라 도시 순례의 길을 걷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어떻게 대비 되는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역사에 따르면,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작은 형제회에서 Nativity Scene 구유 풍경을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의 무지함을 계몽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바로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의 눈과 마음을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께 돌리기 위해 Nativity Scene 구유 풍경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구유 풍경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 드리면 이런 이미지입니다.

허술한 헛간 위에는 천사나 별이 떠 있습니다.

그리고 헛간 안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지요.

보통 왼쪽에는 목자들이 서 있고 그리고 오른쪽에는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모습으로 서 있거나 엎드려 있습니다.

또 외양간답게 여러 동물들 등장합니다.

주로 양이나 나귀 그리고 암탉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양이나 나귀대신 어미 소와 송아지를 두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풍경이 그려지시는 지요.

 

Nativity Scene 구유풍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 바로 정 중앙이지요.

거기에 누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이 계셔야합니다.

 

그런데 Nativity Scene 구유풍경을 자세히 보시면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없습니다.

대림절 4주 동안 빈 구유이지요.

그러다가 성탄절이 오는 바로 전날, 1224일이지요

바로 오늘 밤입니다.

 

성탄 전날인 오늘밤,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Christmas Eve’이지요.

그 늦은 밤, 가장 깊은 밤인 자정에 아기 예수님을 빈 구유 안에 정중히 모시면서 서로 기쁨의 인사를 나누지요.

메리 크리스마스

신앙의 요소가 가미 된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오랫동안 이런 퍼포먼스를 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마스 Mas 곧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마스 Mas 곧 경배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입니다.

산타클로스가 아니지요.

 

둘째 구유 풍경이 주는 질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다시 말해 우리 심령 구유 속에 무엇이 모셔져 있는가?’ 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

혹 빈 구유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대림절 4주 동안 점검하고, 그리스도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으로, 우리 마음속에 왕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바울의 기도와 그 맥락이 같지요.

에베소서 317절입니다.(새번역)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올 해의 성탄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인물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

참 재미있는 분입니다.

우선 그가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했던 삶의 자리,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유대 광야입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예루살렘의 도성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 갈 수 없는 아주 척박한 땅 유대 광야입니다.

짐승들도 길을 잃으면 죽는 땅이 유대 광야인데 그 죽음의 땅을 삶의 자리 사역의 자리로 삼지요. 벌써 영적인 내공이 느껴지지요.

그런데요.

더 신기한 것은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을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옵니다.

심지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까지 찾아옵니다.

그것도 아주 거친 욕을 먹어 가면서도 세례자 요한을 찾아옵니다.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처럼 아주 모욕적인 독설과 비아냥거림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간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죄 사함을 위한 물세례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주로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은 가난한 분들이지요.

곡물제사인 죄 사함의 소제를 드리는 것도 버거운 분들이 죄 사함을 위한 물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자 요한을 찾아 갑니다.

 

두 번째 이유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혹 오실 메시아가 아닐까?’ 라는 기대감이지요.

주로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남달랐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요한복음 119절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루살렘에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얼마나 궁금했던지 사람 하나를 보내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묻지요.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당신이 도대체 누구요?’

그러자 요한이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그러자 재차, 확인하는 차원에서 한 번 더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다시 오신다고 한 엘리야가 맞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당신이 오실 그 예언자 맞습니까?’ 라고 재차 묻습니다.

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그러자 다시 똑 같은 질문으로 또 묻습니다.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당신이 엘리야 그 선지자 맞지요?

그러자 역시 같은 답을 반복합니다.

대답하되 아니라

 

남감하지요.

계속되는 이들의 대화 내용을 본문 그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가 묻습니다.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1: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1: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네가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기에 제사장만 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인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입니다.

그리스도엘리야선지자도 한 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왜 안 될 선을 넘고 있는가? 입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을 아주 명확하게 밝힙니다.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1: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여기에 보면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세례자 요한의 사명.

두 가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26, 물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푸는 일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1:4)

 

또 하나는 마가복음 13(1:23)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준비하는(예비하는) 예비자의 사명입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 세례자 요한’, ‘예비자 요한입니다.

이 두 가지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척박한 유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았던 인물이 바로 요한입니다.

전무후무한 인물이지요.

오죽했으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는 보증을 예수님이 하셨겠습니까?

정말 대단하고 독보적인 인물이지요.

 

따라서 세례 요한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우리가 꼭 주목해 볼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자이자 예비자인 요한만큼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하게 증거 한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증거 한 그리스도.

그 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그 증거들이 오늘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속죄 제물이지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풀어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사실 이 말의 뜻은 죄를 제거한다.‘ ’죄를 도말한다.‘의 뜻과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친히 유월절에 희생당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서 죄로부터 속박한 당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속의 은총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이 첫 번째로 증거 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자기 백성의 죄를 손수 제거하여 주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바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채희동 목사님은 이것을 걸레질하는 예수님으로 표현했습니다.
걸레가 자기 몸을 희생하고 바치고 헌신하여 더러운 곳을 닦아내고 깨끗하게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 또한 자기 희생, 자기 헌신, 자기 내어놓음, 자기 비움, 자기 나눔이 아닌가.”(채희동, <걸레질하시는 예수>, 대한기독교서회, 2004, p.45)

또 하나 세례자이자 예비자인 요한이 증거 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바로 나보다 앞서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보다 앞서신 분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대략 육 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요한이 사촌 형이지요.

하지만 요한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그래서 그는 나 보다 앞서는 분이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세례자이자 예비자인 요한이 증거 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요한복음 132절이지요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성령이 그 위에 머무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머문다‘(meno)는 말은 거처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 온 성령이 예수님을 거처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 인자가 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흑인영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Somebody's Knocking at your Door’ 그 가사를 우리말로 풀면 이렇습니다.

누가 네 문을 두드려

누가 네 문을 두드려

오오 죄인 왜 대답 안 해

누가 네 문을 두드려

 

누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의 문을 두드릴까요?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16:8)

그리고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16:13)

바로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첫째, 내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둘째, 죄인을 부르시면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주신 길 안에서 진리 안에서 그리고 생명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허망한 열정, 절망감, 두려움, 냉소, 경멸에서 벗어나 기쁨의 성탄을 맞이하는 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