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6:9절 주기도문 강해⑨

心貧者 2017. 11. 11. 11:18


주기도문 강해

마태복음 6:92017/11/08()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오늘은 주기도문의 호격인 우리 아버지여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요즈음 거울을 볼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납니다.

얼굴의 생김새나 걷는 모습 심지어 먹는 모습 속에서 아버지가 보입니다. 특히 꾸부정한 뒷모습은 영락없이 아버지이지요.

이 전에는 잘 몰랐는데 미처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눈매 콧매 입매가 점점 아버지의 형상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마도 여러 이미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권위적이고 완고한 이미지도 있을 것이고 자상하지만 고집스러운 모습도 그려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부가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이미지일까요?

성경은 크게 두 가지의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 계신 초월적이고 절대적전능의 이미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할 때 이미지가 바로 이런 이미지입니다.

이름하나 만으로도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이지요.

 

또 하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이미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이미지이지요.

설명이 필요 없는 이 비유에서 우리는 아주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 속한 보통의 아버지는 기업의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기업()의 유산은 단순한 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물러 받은 상속 언약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기업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반가울리 없지요.

이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 속한 보통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보십시오.

아주 특이합니다.

15:20 이에 일어나서(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메타노이아, 회개)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뿐만이 아닙니다.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처럼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특이한 아버지는 하나님과 자신을 우습게 여긴 호래자식을 최고로 대우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사랑을 허비하시는 탕부의 비유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허비하시는 참 아버지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두 번째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하나님은 이런 이미지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죄와 불의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는 무서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

그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죽음으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둘째 아들처럼 불의하게 행동했다면 자비는커녕 당장 천벌을 받아야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미지를 바꿀 것을 요구하십니다.

바로 끊임없이 사랑을 허비하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입니다.

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분노하시고 심판하시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한 없이 아파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의 대한 심판으로 자신의 아들을 어린양 희생 제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을 허비하시는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사랑을 허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우습게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자비를 무색하게 할 만큼 죄와 벗하는 분들이 있지요.

 

이런 분들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시 죄의 심판이 미루어진 것뿐이지 결국 그 사람은 결산하는 날에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분들을 만나면 비난이나 비판하기보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서, ‘아버지의 이미지와 함께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 번역에 따르면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이 됩니다.

파테르

이 호칭의 배후에는 아람어 아빠(우리말 아빠와 발음과 뜻이 동일함)가 있습니다.

 

14:36 이르시되 아빠(개역한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호칭이 주는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첫째,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 예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을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듯 아빠라고 부릅니다.

 

둘째, 이 호칭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시게 되었고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십니다.

 

셋째, 그렇다면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리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아빠라는 호칭을 주기도에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친근함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근함을 다른 호칭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자입니다.

감히 그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우신 분입니다.

경외敬畏,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자식을 향해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그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육신의 아버지처럼 아빠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초청이지요.

구약의 하나님과 다르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라는 초청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 기억 속에서 저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와 함께 단 둘이 찍은 사진이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후회되는 모릅니다.

 

아마도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맺기에 성공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빠 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로마서 814-17(새 번역)

8: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아들들)입니다.

8:15 여러분은 또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아들의 신분으로, 아들 됨)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8: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8: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8:18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8:19 피조물(세상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through) 그리고 성령 안에서(in) 우리가 아빠 아버지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이루었다면 그 관계 맺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바울 사도는 강조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817절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818절로, ‘소망과 인내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주기도문의 송영인 나라‘ ’권세‘ ’영광을 모두 포함)을 소망하며 고난 중에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새 번째, 죄로 인해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의 마지막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19절입니다.

8:19 피조물(세상)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through) 그리고 성령 안에서(in)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호칭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바로 아빠 아버지입니다.

 

이 호칭을 우리가 매일 같이 부르면서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간다면 육에 속한 연약한 우리도 머지않아 우리 자신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 둘씩 보여 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하고 더 깊어 가면 갈수록 우리말과 행동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 날까지 소망을 잃지 마시고, 고난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