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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12-19절 애통하는 슬픔이 왜 복일까?

心貧者 2017. 11. 2. 11:36


애통하는 슬픔이 왜 복일까?

베드로전서 4:12-192017/10/29종교개혁주일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로 인해

첫째, 인간은 누구나 악의 가능성이 늘 내재되어 있다는 것

둘째, 그래서 적절한 상황만 조성되면 악은 참 쉽게 우리 곁으로 다가올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악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셋째, 우리를 노예처럼 지배하는 악은 너무도 쉽게 전염되고 증폭된다는 불편한 진실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쓴 로마서 6장에서 악을 대적하고 악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도 엿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

그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면, ‘그분의 제자가 되면,

악을 대적할 수 있고, 악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죄로부터 탈출하고 원죄로부터 해방 된 우리는 악을 물리치고 불의를 대적하는 선한 의지를 발동해야합니다.

그래야 보혜사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도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의의 흉배 등)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제시한 해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 , 얼굴, 입술)를 죄에 내주어 불의의 무기 불의의 연장으로 삼지 말고 의의 무기, 의의 연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편 11절의 권면처럼 악을 꾸미는 자리에서 반드시 떠나야합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은혜아래 거하면서 아멘의 삶을 사십시오.

손해가 난다 할지라도 의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답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대적하십시오.

특히 죄인들의 길을 함께 거닐지 말고, 남을 깔보고 놀리는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마십시오.

 

이것이 악을 대적하고 악을 물리치고 악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악으로 말미암은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이 겪는 아픔에는 크게 세 가지의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 의해서 만들어지는 못된 아픔입니다.

흉악한 모습으로 악이 표출되고 전염되고 증폭되면 선량한 사람들, 특히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 악으로 인해 못된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세월호의 아픔이 그 대표적인 아픔이지요.

 

또 하나는 인간의 악과 상관없이 닥쳐오는 슬픈 아픔도 있습니다.

앞의 경우와 반대되는 경우인데,

특히 선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닥쳐오는 아픔이지요.

예를 들자면

나라를 위해 겪는 아픔이라든가 이웃을 위해 겪는 아픔이라든가 불의를 대적함으로 겪는 아픔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로 인한 망연자실한 아픔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내 삶에 닿는 순간 슬픔이 되고, 아픔이 되고, 애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것이 슬픔인지, 아픔인지, 애통인지 모릅니다.

남의 일이지요.

 

인간의 아픔을 처음 기록한 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여기에 보면 원죄의 결과로 인해 주어진 아픔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여자에게 주어진 아픔입니다.

3:16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던 존귀한 여자는 임신과 해산하는 고통과 함께 남편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종속) 아픔을 겪게 됩니다.

둘째 남자에게 주어진 아픔입니다.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가 아담입니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저주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평생 고생이라는 아픔을 달고 살게 됩니다.

셋째 땅에 기대어 사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아픔입니다.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수 있는 아픔을 앉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이 증언하고 있는 원죄의 결과들이자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인간의 아픔들입니다.

그래서 아픔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픔의 가치를 재발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아픔 없는 행복이 아니라 아픔 안에서의 행복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아픔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제거하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픔을 반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픔 가운데 위로자로 도우시는 자로 구원하는 자로 계신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생에게도 아픔이 다르겠지만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고난과 더 많은 아픔이 오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핵심은 악행으로 인한 못된 고난(아픔)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악행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지 우리가 참여해야할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여해야할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얻게 되는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얻게 되는 상처(스티그마)이지요.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6절입니다.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으로 겪게 되는 고난 그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 신앙의 모습을 한 번 되 집어 봅시다.

첫째,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고난과 핍박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요.

둘째,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자랑스럽고 즐거우신지요.

한 번 진지하게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한 거짓 복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가난해 지셨습니까?

그러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남의 것을 탐내고 도둑질을 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그리스도로 인한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의 흔적 핍박의 상처가 있습니까?

그러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남을 헤하고도 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이 부끄러운 것이지 그리스도로 인한 상처 그 고난의 흔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기복신앙과 번영으로 오염된 교회가 문제이지 그리스도로 인한 가난, 그리스도로 인한 상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얻게 되는 고난,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절대 믿음이지요.

낙심이 없는 절대 믿음입니다.

(찬송가 5851절 전반부)

 

말씀을 마칩니다.

그렇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나가사키에 세워진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쿠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인간은 이다지도 슬픈데, 주님의 바다는 너무나 푸르기만 합니다.

 

나는 지금 미치도록 아픈데, 삶 자체가 깜깜한 암흑인데,

미치도록 파란 하늘과 미치도록 아름다운 햇살을 볼 때 왜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5장 행복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미치도록 아픈데, 미치도록 슬픈데, 왜 그것이 복이 된다고 하신 것일까요?

단 한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위로입니다.

 

올해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윤동주.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고 고난 받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늘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행복선언에 등장하는 팔복을 이렇게 고쳐 노래합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어떻습니까?

영원히 슬퍼할 만한 아픔의 상처가 여러분 심령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까?

그리스도로 인한, 복음으로 인한,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 인한 그 상처가 우리 삶 속에 새겨져 있는지요?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영원한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 아픔의 상처가 그 고난의 흔적이 마지 막 날에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처럼요?

우리보다 앞서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부활하셨던 우리 예수님처럼 입니다.

그러니 신실한 믿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아픔과 슬픔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당당하게 감수하십시오.

그러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주님의 영원히 위로가 임하실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 갇혀 지낼 때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기도를 쓰셨다고 합니다.

빈방 홀로 지키니 고적감이 밀려오누나.

성삼위 함께 하여 네 식구 되었도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