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16절 청년 그리스도교
청년 그리스도교
마태복음 5:13-16절 2017/10/08 성령강림 후 18주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식민지 백성의 고달픈 영혼을 위로하고 흔들어 깨웠던 김교신 선생님은 그리스도교를 ‘청년의 종교’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청년의 종교’이지요.
‘노년의 종교’가 아니라 ‘청년의 종교’입니다.
김교신 전집 1권 ‘信仰과 人生’의 나오는 글에 보면 청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혹은 그럴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한번 노쇠하여 버리면 다시 기독교에 돌아올 수 없다 함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중간생략)
기독교는 특히 ‘청년의 종교’라는 사실이다.
이해利害에 담박하고(욕심이 없고 순수하다) 정의正義에 용약湧躍함(용감하게 뛰어나다)은 이것이 청년의 넋이요.
인습(옛 습관)을 물리치고 진리眞理에 취就하며 허위(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조작하는 것)를 깨뜨리고 실질實質을 취하려 함은 청년靑年의 의기意氣요.
과거의 경험 속에 지구脂垢(기름때, 찌든 때)로써 신경神經을 은폐치 않고, 예기발랄銳氣潑剌한 감수성感受性으로 진위허실眞僞虛實을 판별하는 것이 청년기靑年期의 본능이 아닌가.
기독교가 청년의 종교인 동시에 기독교는 청년으로 하여금 영원히 청년으로 머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진실로 기독교 신자일진데 저는 비록 고희를 넘을지라도 오히려 청년일 것이다.
(중간생략)
우리는 초국(초나라) 현인 노래자가 70에 오히려 오채의(五彩衣, 오색 색동저고리)를 입고 친전(親前, 아버지 앞에서)에서 영아희(嬰兒戱, 어린아이 재롱)를 떨었던 것처럼,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청년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비록 우리의 생물학적 나이가 고희古稀, 70세가 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만큼은 오색 색동저고리를 입고 어린아이 재롱을 떨 수 있는 영원한 청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청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이해에 있어 욕심이 없고 순수하며, 정의에 있어서 용감하게 뛰어난 종교
둘째, 인습 즉 썩게 하는 옛 습관을 물리치고 오직 진리眞理(참)만을 취하는 종교.
셋째,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조작하는 허의의식을 모두 깨뜨리고 오직 진실과 본질만을 취하는 종교
넷째, 과거의 경험 속에 갇혀 생긴 찌든 때로 신경이 마비되지 않은 종교.
마지막 다섯 번째, 예기발랄銳氣潑剌한 감수성感受性으로 진실과 거짓 그리고 허상과 실체를 판별(분별)하는 종교
이것이 김교신 성생님이 말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청년의 종교, 그리스도의 특징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의 한국 그리스도교, 청년의 종교 같습니까?
애매하지요.
어느 때부터인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재롱떨었던 청년의 본능과 패기는 다 사라지고 선교 130년이라는 나이 값만 들먹이는 노년의 그리스도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김교신 선생님이 마지막 말씀이 아직도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말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그리스도교의 신자라면,
비록 고희, 70세가 넘는 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만큼은 오색 색동저고리를 입고 어린아이 재롱을 떨 수 있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
저는 이 말씀이 아직도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빌립보서 3: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즉 뒤에 있는 것 과거의 삶, 죄의 종노릇 했던 지난날의 삶은 잊어버리고, ‘부르신 부름의 상’ 곧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신 사명이 주는 상인 하나님 나라의 푯대, 그 푯대를 향해 달음질 하는 인생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하늘나라 백성으로 나아가는 달음질입니다.
이처럼 바울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달음질 하는 청년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교회만 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너무 늙고 낡아버렸습니다.
푯대도 없고 패기도 없고 도전도 없지요.
그저 현실에서 안주하려고만 하고 있고 맥없이 주저 않으려고만 하지요.
요즈음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마다 총회가 한창입니다.
감리교회도 곧 입법총회를 할 텐데, 교단과 교파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동적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퇴행입니다.
신앙의 퇴행, 신학의 퇴행, 그리고 치리의 퇴행입니다.
목사인 것이 부끄러울 만큼 퇴행이 아주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회는 날마다 진보하고 있고 개혁의 길로 나아가는데 이 사회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할 교회는 점점 퇴행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주 부끄러울 정도로 그 정도가 아주 심각합니다.
앞서 청년 종교,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설명을 드렸는데 교단마다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10월 마지막 주 종교개혁주일, 예배주사)
첫째, 서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너무 심해 정의(바르고 옳음)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둘째, 인습 즉 썩게 하는 교회의 옛 습관을 물리치고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총대, 여성안수, 세습, 매매)
셋째,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조작하는 허의의식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넷째, 과거의 경험 속에 갇혀 생긴 찌든 때로 인해 개혁과 갱신의 신경이 마비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예기발랄銳氣潑剌한 감수성感受性도 없고 진실과 거짓 그리고 허상과 실체를 판별하는 능력마저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과 주목해 볼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5장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자 ‘교회의 생명력’이 담겨진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여기에 보면 제자들을 향해 우리 주님이 ‘그리스도인인 교회’와 그리고 ‘그의 공동체 모임인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선언합니다.
첫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둘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아주 간결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모세의 십계명처럼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변화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은 모세의 십계명처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라는 명령으로 말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해야합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변화의 결과’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고 빛이다'라고 설명만 하고 계십니다.
물론 두 가지의 의미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둘 다 의미에 있어서는 ‘명령의 내용’이나 ‘변화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동일합니다. 사실 이 둘을 명확하게 분별할 만한 능력도 없지요.
하지만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 주님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교, 참된 교회인 우리로 말미암은 변화의 결과들입니다.
즉,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5장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자, 그렇다면 변화의 결과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답을 우리는 5장 13절 후반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여기서 핵심은 ‘만일 그 맛을 잃으면’입니다.
‘맛’이라는 ‘변화’이지요.
그런데 맛이라는 ‘변화’ 그 본질을 우리가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쓸데없는 그리스도인, 아무 쓸데없는 그리스도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소금다움은 결국 짠 맛을 내는 맛의 변화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본문 바로 앞에 있는 팔복의 말씀과 연결시키면 그 답을 근방 찾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2. 진리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3. 모든 이들과 온유한 사람입니다.
4.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5,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자비한 사람입니다.
6. 마음이 깨끗한(사욕이 없는) 사람입니다.
7.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8. 네 번째 복인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넘어 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복을 지닌 사람들이 바로 맛의 변화에 따라 세상의 소금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결한 복’에 교회지도자들이 MSG를 듬뿍 치지요.
성공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을 넘어 세상의 부자가 되라고 합니다.
또 값싼 위로를 넘어 정의와 무관한 사랑을 입술로만 팔고 있습니다.
이 뿐만 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과 다르다는 그릇 된 특권의식을 심어주고 있지요.
두 번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말씀 값을 충실히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 이 말씀은 우리가 16절과 꼭 연결해서 해석해야합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빛’
우리의 무엇이(어떤 것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착한행실’입니다.
두 가지의 착한 행실인데,
하나는 사람 앞에 비치는 착한행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착한행실입니다.
물론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 안에 이 전과 다른 새롭게 변화가 된 그 어떤 것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18절입니다.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늘 세상의 소금 그리고 세상의 빛이 되는 청년의 신앙을 유지하고 그리고 우리 교회가 늘 젊음의 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의 행동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니오’라는 부정의 행동입니다.
죄의 대해서 불의에 대해서 그리고 거짓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합니다.
시편 1편 1절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또 하나는 ‘예’라는 긍정의 행동입니다.
아멘의 삶이지요.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아멘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맛 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다’
그러면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착한 행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시절 85세 된 갈렙이 그랬다지요?
여호수아 14장
14: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4: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4: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러니 몸이 늙었다고 신앙생활마저 늙게 하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의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만큼은 오색 색동저고리를 입고 재롱을 떨 수 있는 영원한 청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