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가복음 2:1-12 도무지 보지 못한 일

心貧者 2017. 5. 2. 11:02


도무지 보지 못한 일

마가복음 2:1-122017/04/30(주일)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세환 씨가 부른 노래 가운데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은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한번 불러 볼까요?

 

1.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 걸

밀려오는 그 마음보다 포근한 건 없을 걸

2.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행복

억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 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짜릿한 건 없을 걸 짜릿한 건 없을 걸

 

사랑이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랑은 그 사람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랑에 대한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입니다.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에 보면 방향을 잃어버린 그릇된 사랑’ 3가지가 나옵니다.

몇 절과 몇 절에 나옵니까?

2절에 두 번 그리고 4절에 한번 나옵니다.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모두 사랑의 대상을 잘못 설정한 사랑들이지요.

그리고 이런 그릇된 사랑들은 모든 죄와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

 

간단하게 예를 하나씩 들어 보겠습니다.

 

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될까요?

그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립보서 2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기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오직 자기의 일, 자기만족, 자기 행복에만 관심이 있지 정작 있어야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 역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돈은 사용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돈에 대한 집착과 사랑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돈이 가지고 있는 '유사 전능성'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고 못할 일이 없다는 유사 전능성

그 거짓된 교훈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것 역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됩니다.

사실 쾌락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요.

하지만 쾌락이 주는 즐거움에 이끌려 뭔가에 푹 빠져 살다보면 정말 아끼고 존중해야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용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뒤집는 순간 그 좋은 것들이 다 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세환 씨의 노래처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이 사랑의 마음인데, 그 사랑의 마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하늘로부터 와서 낮은 자리로 향해야 합니다.

출발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와서 그 최종 목적지는 가장 낮은 자리 과부, 고아, 나그네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좀 어려운 말로 ‘incarnation’ 성육신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incarnation에서 전치사 ‘in’을 빼면 ‘carnation’이 됩니다.

‘carnation’ 꽃이지요.

향이 좋던가요?

사실 잘 모르겠지요.

서양에서는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난다고 해서 식탁에 놓지 않는 곳이 카네이션입니다.

그런데도 이 꽃이 사랑의 상징이 되었지요.

 

왜 그렇습니까?

carnation이라는 말 속에 사랑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전치사 ‘in’이 붙어서 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높은 사랑이 낮은 자리에 있는 나에게까지 들어온 것이지요.

죄인 중에 괴수이자 벌레보다 못한 나에게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incarnation’ 성육신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 계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집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더 이상 들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매워 데리고 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행동입니다.

더 이상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다소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합니까?

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당시 이스라엘의 집 지붕은 나뭇가지로 엮어서 점토를 발라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걷어내고 구멍을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희귀한 일이지요.

어찌되었든 그들은 지붕 위 뚫린 구멍으로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incarnation’의 의미처럼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온 것이지요.

아주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러자 이 광경을 지켜보신 예수님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문맥상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25절입니다.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사실 중풍병자가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9절을 봅시다.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떤 말씀이 더 듣고 싶었겠습니까?

당연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가 원하는 그 말씀을 먼저 하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2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사실 이 말씀 하나 때문에 서기관과 논쟁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왜 그랬을까?

incarnation, 곧 육신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바로 죄 사함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차리거나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 사함에 대해서 가장 불편하게 여긴 이들이 있었는데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병자들 특히 중풍병자에 대해서 두 가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중풍 병을 죗값으로 보았습니다.

누가 중풍 병에 걸리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들이 중풍 병에 걸린다고 보았습니다.

죄의 결과이지요.

 

둘째, 따라서 죄의 결과인 중풍 병, 누가 고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27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그런 능력을 행할 자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분들의 주장.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습니다.

율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방향을 잃어버린 서기관들의 믿음이지요.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신성 모독인데...’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 사할 권세가 없는데...’

 

그러자 믿음의 방향을 잃어버린 그들을 향해 우리 주님이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에게는 두 가지의 권세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죄 사함의 권세뿐만 아니라 둘째, 죄로 말미암은 중풍 병을 치유하는 권세 역시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인데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방향을 바로 잡은 이들이지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중풍병자를 침상을 메고 와서 지붕을 뚫었던 네 사람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법궤를 멘 것처럼 동서남북사방에서 문둥병자의 침상을 메고 와서, 천장을 뚫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예수님 앞에 문둥병자를 데려다 놓았던 분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실제적인 주인공들이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의 권세와 병 고침의 능력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여러분들이 죄 사함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 믿음의 주체를 바로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의 믿음입니까?

중풍병자입니까? 사방에서 침상을 멘 네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자비로 똘똘 뭉쳐 중풍병자의 침상을 멘 네 사람입니다.

 

이 네 명이 보여준 믿음은 참으로 중요한 믿음이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서기관처럼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도무지 보지 못한 일

그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물리적인 기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죄 사함의 기적 그리고 네 사람이 보여준 믿음의 기적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방향을 잃어버린 교회가 회복해야할 사역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크게 두 부류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서기관처럼 정죄 하는 인간입니다.

또 하나는 중풍병자의 침상을 멘 네 사람처럼 정죄의 자리에서 죄 사함의 자리로 인도하는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고 싶습니까?

 

끝으로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꿈꾸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네 사람의 동지들입니다.

신앙의 동지들이지요.

가버나움 네 명의 동지들처럼 뜻이 맡고 호흡이 맞고 서로 손이 맞는 네 사람의 신앙 동지들입니다.

기도의 동지 네 사람, 믿음의 동지 네 사람, 전도의 동지 네 사람, 예배의 동지 네 사람 그리고 봉사의 동지 네 사람만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아마 우리의 믿음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 역시 확 달라질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처럼 도무지 보지 못한 일들즉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 부흥의 역사 축복의 역사를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똘똘 뭉친 네 명의 신앙의 동지들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일을 이루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