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9: 1-8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9:1-8절 2017/03/24(금)
19: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인간에게는 익숙하지 않는 두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안의 감정이고
또 하나는 그에 따른 좌절의 감정입니다.
보통 교회 안에서 ‘환란과 시험’이라고 말하지만 ‘불안과 좌절’이지요.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이것을 ‘혼돈과 공허’라고 말하는데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은 뜻입니다.
‘불안과 좌절’
언제 최근에 느껴보셨습니까?
아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불안과 좌절’의 삶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불안의 감정이고 좌절의 감정입니다.
좀처럼 친해질 수 없는 감정들이지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엘리야입니다.
대표적인 하나님의 선지자이지요.
율법 그러면 모세, 선지자 그러면 엘리야로 통할 정도로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엘리야, 그러면 성경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습니까?
첫째, 갈멜산 전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죄와 부도덕이 난무했던 시대가 아합왕 시대인데 그 때 아합 왕의 측근이자 가장 신뢰하는 바알예언자, 아세라예언자 850명을 죽인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건이 생각납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건이 생각납니까?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한 빛으로 변형되었을 때, 모세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분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온다면 어떤 분의 모습을 입고 올까?
그리스도의 모형 누구입니까?
엘리야입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만 엘리야에 대한 언급이 27번 등장합니다.
모세가 37번, 다윗 35번, 아브라함 30번 그리고 엘리야가 27번입니다.
이처럼 대단한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선지자도 피해갈 수 없는 두 가지 감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불안의 감정과 좌절의 감정입니다.
오늘본문의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아 활동하던 시대는 아합왕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북쪽에 있는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하게 됩니다.
전략적인 결혼이지요.
그러니 이세벨 왕비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혼수품, 시종, 건축기술자, 친위대 병사와 함께 받아들인 것이 가나안의 주신인 바알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아합왕의 비호를 받으면서 고위관리로부터 시작해서 일반백성에게 이르기 까지 급속도로 전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열왕기상 21장에 등장하는 나봇의 포도원 강탈 사건이지요.
이 사건이 입소문이 나면서 북이스라엘의 민심이 아주 흉흉해졌습니다.
민심만 흉흉해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찾아오는데 3년 가뭄이 찾아옵니다.
이때 등장한 예언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제안 하나를 아합왕에게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모든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 누가 과연 참 하나님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대결을 해 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바알’과 ‘여호와’
누가 이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깁니다.
그러자 그동안 바알에게 농락당했던 어리석은 백성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열왕기상 18장입니다.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그리고 분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 850명을 붙잡아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기손 강가로 데려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 후 3년 가뭄이 해결되게 됩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문제가 엘리야 신변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이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하게 됩니다.
19: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 소식을 엘리야가 접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둑처럼 들어 온 두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불안감이었고 또 하나는 좌절감이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850대 1의 정면 승부가 그 자리를 조용히 피하게 됩니다.
회피이지요.
그래서 가나안땅의 최남단이자 남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로 도망칩니다.
최북단 ‘갈멘산’에서 일곱 개의 우물이 있는 최남단 ‘브엘세바’로 도망칩니다.
비굴도 이런 비굴함이 없지요.
비참 그 자체이지요.
엘리야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고단했던지 정말 드리지 말아야할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비참하지요.
이 기도를 드리다가 엘리야가 잠들게 됩니다.
고통의 밤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때 누가 찾아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옵니다.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불안 속에서
그리고 좌절 속에 있는 엘리야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천사가 행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를 어루만지며
둘째,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불안으로 가득한 심령을 어루만져 주고
좌절 속에 있는 이을 일으켜 세워 돌보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막 흥분이 되고 감동이 됩니다.
잘했다 잘못했다 훈계하지도 않고
그리고 못나고 비겁하다고 꾸짖지도 않는 하나님.
불안과 좌절 속에서도 단잠을 주시고
품어 안아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
심지어 우리를 흔들어 깨워 힘내라고 말없이 밥상까지 차려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 참 고맙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막 흥분이 되고 감동이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살다보면 올무와 같은 시험에 걸릴 때가 왜 없겠습니까?
왜 불안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왜 좌절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오늘 본문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루만져주시고
밥상을 차려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의 손길이 오늘밤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