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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 54-58 익숙함을 넘어

心貧者 2017. 3. 21. 18:32


익숙함을 넘어

마태복음 13:54-582017/03/19 사순절 제3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13: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속해 있는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에 대한 비유로 아주 유명 장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비유들이 있는지 한 번 꼼꼼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3-9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둘째, 24-30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

셋째, 31-32 겨자씨 한 알의 비유

넷째, 33 누룩의 비유

다섯째, 44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여섯째, 45-46 값지고 좋은 진주의 비유

마지막 일곱 번째, 47-50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의 비유가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을 비유장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마치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지요.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비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참 큽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을 소재로 삼아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씨앗이라든가 누룩이라든가 보화와 진주라든가 그물 등 아주 평평한 소재들로 사용하십니다.

갈릴리의 농부들이나 어부들, 그리고 갈릴리의 가정주부들이 늘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 비유의 소재로 사용될 정도로 아주 평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는 특이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속된 것들 예를 들자면 씨앗이라든가 누룩이라든가 보화라든가 진주라든가 그물 등 그 속된 물건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율법의 교훈을 예수님이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비유 설교의 결론은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인 마태복음 1351-52절입니다.

13: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여기서 제자의 조건 하나가 나오지요?

누가, 주님의 제자입니까?

‘14-15에 나오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귀 있는 사람 바로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계속해서 52절입니다.

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새 것(예수님의 가르침) 과 낡은 것(모세의 가르침)

여러분들이 집주인이라면 어떤 것을 하늘나라에 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깨달은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모세의 전통에 따라 낡고 익숙한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바른 답과 바른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를 다 마치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향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고향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나사렛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으로 향하셨을까요?

그러고 보니 유독 눈에 들어오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고향이라는 단어입니다.

54고향으로 돌아가사

고향

듣기만 해도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지요.

하지만 한 걸은 더 들어가서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반대의 감성으로 흘러갑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어찌 보면 굉장히 평범한 도입구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중요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고향'이란 말을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보편적으로 마태는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설명할 때 지명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여기에서는 나사렛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고향'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합니다.

 

왜 그랬을까?

고향헬라어로 'fatrida(파트리다)'라고 발음합니다.

'fatrida(파트리다)'

아버지를 뜻하는 'fater'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고향은 '아버지의 땅'으로 예수님에게는 아주 친숙하고 익숙한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천국에 대한 일곱 비유를 마치시자마자 고향으로 향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다분히 의도성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3장에 배경이 되는 마태복음 12:48-50절에서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서 교향으로 돌아올 것을 권면했을 때 예수님은 고향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단호함을 보입니다.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한 마디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예수님이 천국에 대한 일곱 비유를 마치시자마자 숨도 안 고르시고 느닷없이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확실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 온 예수님을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처럼 고향 사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새 번역 성경으로 55절부터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3:55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13:56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13:57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반응이 아주 부정적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 지혜와 능력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1354절입니다.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도 대놓고 그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배척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자신들만의 익숙함, 그 익숙함을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익숙함이라는 옛것의 문턱을 고향 사람들이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향,

그 고향을 지키는 것은 참 좋고 귀한 일입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새것은 항상 옛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옛것 곧 율법의 삶을 익히기만 할 뿐 그것을 통하여 새것 곧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삶과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변화의 삶을 알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의 참 뜻은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아는 것인데 그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3장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천국에 대한 일곱 가지 비유의 말씀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와 능력의 말씀들이라는 것을 고향사람들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것에 대한 새로운 삶에 대한 변화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그 익숙함을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 목수의 아들로만 바라보았지 그의 가르침을 받고도 하나님의 아들로는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 온 분쟁의 씨앗 예수님이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비극이지요.

 

평행본문인 마가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마가복음 6장입니다.

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말씀이 62절에 나오는 고향 사람들의 질문 내용입니다.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권능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내용입니다.

이 질문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잇습니다.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이 말한 '그 손'이란 바로 그 다음절 63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의 손을 낮잡아 비하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

목수의 손

돌과 나무를 다루는 다시 말해 건축 일을 하는 노동자의 손입니다.

어떻게 건축하는 노동의 손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겉만 보고 아는 익숙함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 넘어진 것이지요.

배척한다는 말은 스스로 넘어진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스칸달론이지요.

이처럼 자신이 알고 있다는 그 익숙함이 이렇게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 비유를 마치자마자 길을 떠난 예수님이 곧바로 찾아 간 곳은 고향이었습니다.

고향, 아버지의 땅이지요.

얼마가 심장이 뛰고 기대가 컸겠습니까?

어쩌면 아버지의 땅, 고향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힘차게 고향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달갑지 여기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익숙함이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지요.

 

그러자 우리 주님이 이 한마디 남기시고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어떠한 가르침도 그 어떠한 능력도 고향에서 행하지 않습니다.

 

일전에 찾아 묵상 했던 찬송인데 찬송가 302장을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3절에서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익숙함을 넘지 못하는 지금 우리의 꼴이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익숙함 때문에 또는 두려움 때문에 또는 비겁함 때문에 또는 자존심 때문이 큰 바다보다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익숙함이라는 언덕, 그 비빌 수 있는 언덕을 하루 빨리 떠나십시오.

등 따시고 배부른 비빌 수 있는 언덕을 하루 빨리 떠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 그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후렴입니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주 예수 은혜로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사실 우리가 '안다' 하지만 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성경의 세계가 그렇고 신앙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익숙함을 넘어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귀하고 좋은 것을 가르쳐 줘도 그것이 귀한 줄 모르고 비빌 언덕만 찾고 그 익숙함에 안주만 하려 한다면 분명한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어떤 역사도 그 어떤 능력도 우리와 우리 교회에 행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익숙함이라는 언덕을 떠나십시오.

첫째, 익숙한 기도를 넘어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 보십시오.

통성기도도 해 보고 금식기도도 해 보십시오.

또 침묵기도 관상기도도 해 보십시오.

5분 기도에서 102030분 한 시간 그 기도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골방기도가 무엇인지 한 번 진지하게 해 보십시오.

 

둘째, 익숙한 말씀을 넘어 더 넓은 말씀의 세계로 좀 들어가 보십시오.

새 번역, 공동번역, 메시지 성경 등 좀 다양한 성경으로 더 넓은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 보십시오.

한문이 되는 분은 한문 성경으로 영어가 되는 분은 영어 성경으로 원어가 되는 분은 원어 성경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의 세계가 확 달라집니다.

이단 할아버지가 와도 흔들림이 없지요.

 

셋째 익숙한 예배를 넘어 더 높은 예배의 세계로 올라가 보십시오.

주일 예배만 드리는 분을 권면하시고 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속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등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의 예배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 그 높은 예배의 세계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담장 밖 넘어 예배의 삶까지 한 걸은 더 넓혀보십시오.

 

넷째, 익숙한 헌신과 봉사를 넘어 더 생동감 넘치는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교회의 빛도 좋지만 세상의 빛답게 좀 살아가십시오.

교회 안에서도 폼 나는 일을 하시고 세상에서도 폼 나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익숙함 넘는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생명의 길 그리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실 것이고 인도하실 것이고 최후 승리까지 역사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