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사도행전 6:8-15 스데반

心貧者 2017. 2. 8. 14:15


스데반

사도행전 6:8-152017/2/12(주현 후 5주 주일오후)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6: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 가운데 늘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9351217일부터 20일까지 34일 동안 열렸던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에서 주기철 목사님이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디두모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디두모라고도 불렸던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던 요한복음1116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한 설교입니다.

당시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인 젊은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직원들에게까지 심령의 큰 불을 지폈던 명 설교로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설교의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같이, 시들어 떨어질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더럽게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각오와 다짐과 정절을 지켜 나갑시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스데반도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흘려 주님을 향한 그의 다짐을 지켜 나갔습니다.”

 

어떻습니까?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했던 세례요한처럼 그리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거 했던 스데반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남의 이목이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있는지요?

그리고 여러분의 몸이 더 시들기 전에 그 몸을 주님의 제단에 들려지기를 바라는 각오와 다짐과 정절이 서 있는지요?

또 주님의 제단으로 허락 된 이 교회에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아낌없이 드릴 일사의 각오가 서 있는지요?

 

지난 며칠 동안 교회에 대해서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교회란 무엇인가?

둘째,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마지 막 셋째, 가장 현실적인 질문인데, 그런 교회가 있기는 하는 것인가?

아니 그런 교회와 공동체가 가능하기는 하는가?

 

그러다가 현재 우리가 처한 교회의 모습을 좀 냉정하게 진단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일사 각오를 위한 자기반성이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를 빗대어 좀 냉정하게 진단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아시아 지방에 속한 일곱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 일곱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가 우리의 모습과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각자가 바라보는 견해가 다르겠지만 저는 우리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반성을 위한 제 견해인 만큼 여러분들이 꼭 동의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라오디게아 교회만큼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대변해 주는 교회가 없는 것 같아 아프지만 그리고 슬프지만 저는 일사 각오를 위한 자기반성 차원에서 우리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일곱 교회 가운데 한 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한 유일한 교회로 등장합니다.

어쩌다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세워진 소아시아의 라오디게아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값비싼 의복 생산과 대부업 그리고 의약품 제조를 통해 그 도시의 시민은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세워진 라오디게아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입니다.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3:15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3: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라오디게아는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히에로폴리스와 가까웠습니다, 그곳에서 솟아난 물이 흘러흘러 라오디게아에 이를 무렵이면 미지근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지역적 특성과 관련시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믿음을 미지근함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 곧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상태의 믿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미지근함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3: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3: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3: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여러분은 제가 교회와 그리고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까?

많이 사랑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조금 사랑하는 것 같습니까?

저는 교회와 여러분들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319절의 말씀처럼 일사의 각오를 위한 자기 반성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교회이고 바로 여러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제가 우리 교회가 처한 믿음의 형편을 라오디아 교회의 믿음으로 비유했을까요?

바로 미지근함때문입니다.

미지근한 믿음이지요.

믿음은 믿음인데, 믿음의 역사 곧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좀 조심스럽지만 단적인 예 하나를 들겠습니다.

어디 까지나 단적인 예인만큼 이것 역시 여러분들이 꼭 동의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21일 새벽에 월삭새벽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빈자리가 없을 만큼 아주 뜨겁게 모여 말씀보고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은 어떠했습니까?

 

현재 우리가 처한 미지근한 믿음의 한 단 면을 보는 것 같아서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교회의 부흥과 신앙의 부흥, 그리도 말씀의 부흥과 기도의 부흥을 정말 갈망하는 이들이라면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뿐 만이 아닙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나 경건의 능력이나 성령의 열매를 정말 애절하게 갈망하는 열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냉철한 비판 의식이나 깨끗한 양심,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언자적 시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일을 보아도 분노하는 양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예배나 기도회를 통해 뭔가 중요한 삶의 변화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일어날 거라고 여기는 기대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이 복음의 대의를 이루는 일인데 그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사의 각오를 위한 자기 반성차원에서 집사님 한 분의 삶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역사적인 사건, 세 가지 위에서 세워지게 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생명이지요.

믿음의 (역사)행위인 생명과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승천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이지요.

소망의 인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거룩하신 이의 영이자 진리의 영이신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세상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인 교회가 형성되게 됩니다.

성령의 권능(뒤나미스)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수고와 애씀이 있는 곳이지요.

 

정리하면, 믿음의 행위와 소망의 인내와 그리고 사랑의 수고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이 칭찬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야만인이라고 촌놈들이라고 무식하다고 손가락질 받았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도 바울로부터 받았던 칭찬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원조는 스데반이 집사로 부름 받고 사역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그 모본입니다.

믿음의 행위와 소망의 인내와 그리고 사랑의 수고가 넘치는 예루살렘 교회이지요.

 

물론 지상의 그 어떤 교회도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견줄 만큼 거룩한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역시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흉내만 내는 허의 의식입니다.

속사람 곧 믿음은 미지근한데 겉 사람 곧 허의 의식만 뜨거운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가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지요.

신앙의 허의 의식입니다.

허세이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이야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 공동체가 '신앙의 허위의식'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들 부부는 정말 놀라운 희생을 가장합니다.

그들은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지만, 일부를 자기들을 위해 떼어 놓고도 마치 재산의 전부를 바친 것처럼 꾸몄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의 허의 의식은 급작스런 그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되었고, 신앙의 허의 의식이, 그리고 보여주기 식 믿음 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의 죽음을 자기반성으로 엄중하게 받아들인 결과 제자들이 점점 불어나게 되었고, 교회의 구성원 역시 다양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넘어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들까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양적 부흥이지요.

 

그런데 그러다가 예루살렘 교회가 또 하나의 약점을 보이게 됩니다.

비교의식으로 인한 갈등 바로 편 가름입니다.

이 역시 교회의 고질적인 질병이지요.

 

당시 유대인들의 경건생활의 핵심은 구제였습니다.

금식도 있고 기도도 있었지만 최고의 덕목은 역시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질이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예비하는 날, 곧 금요일이면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시장과 주택을 찾아다니며 기부할 물품들을 받아와 마을의 극빈자들에게 분배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을 초대교회가 그대로 계승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차별적 시선과 편 가름입니다.

그 결과 여기에 속하지 못한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차별받고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실제로 과부들에게 구제금을 나누어 줄 때 헬라파 유대인들이 차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역 특성 상 히브리파 유대인의 차별적 시선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는 그 일이 상처가 되지요.

 

이런 숨겨진 갈등을 위해 세워진 직분이 디아코노스봉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집사였고 그렇게 세워진 일곱 집사 중에 한 분이 스데반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1-4절입니다.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이렇게 해서 세워진 초대교회 일곱 집사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입니다.

그들의 헌신과 사역은 놀라운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 냅니다.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전에 없었던 변화이자 교회의 부흥인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는 역사입니다.

제사장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감히 상상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부흥 할 수밖에 없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한 번은 스데반이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과의 논쟁이지요.

오늘 본문 69절에 나오는 자유민들이라는 말이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개역 한글판에서는 리버디노개역 개정판에는 자유민들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다 같은 뜻입니다.

로마인의 종으로 있다가 자유를 얻은 유대 사람들의 집단을 우리가 리버니도또는 자유민들이렇게 부릅니다.

그들은 유대교 전통 회당 속에 들어가서 활동하기 보다는 자신들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회당을 따로 독립해서 구성하게 됩니다.

그만큼 독립성고 자존심이 강한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스데반 집사와의 논쟁에서 보기 좋게 무너집니다.

스데반의 인품이나 스데반의 학식이나 스데반의 지혜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을 누가 당해내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거나 패배를 인정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 곧 자유민들이 내린 결론이 스데반 집사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610절입니다.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성전법)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제사법 정결법)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상황을 스데반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십니까?

15절입니다.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지근한 믿음의 행실을 버리고 일사 각오의 다짐으로 회복해야할 믿음의 역사이자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함석헌 선생님은 그 얼굴을 '얼굴'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여러분과 저의 얼굴이 누군가에게 참 아름다운 얼굴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