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7:1-7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출애굽기 17:1-7절 2017/01/15(주일오후)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17: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아픔을 담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늘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한 주간 제가 일부러 찾아 들은 음악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노래는 아니고 서양음악인데 이맘때 꼭 찾아 듣는 음악입니다.
‘Ich habe genug 이히 하베 게누크'라는 칸타타 바리톤 솔로 곡입니다.
한 트랙 분량이 약 25분 정도 되는 곡으로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들었습니다.
이 곡을 쓴 분이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세바스찬) 바흐’ 라는 독일 오르가니스트입니다.
오르가니스트이면서 작곡가이지요.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답게 많은 곡을 남겼는데 그가 쓴 몇 안 되는 칸타타 독창곡 중에 하나가 ‘이히 하베 게누크’입니다.
바리톤 전공 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전통 클레식 중에 클레식이지요.
1727년에 발표된 노래이니까 올해로 290년 된 노래입니다.
꽤 사랑받은 노래지요.
‘이히 하베 게누크'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는 만족합니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Ich habe genug(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몇 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편 23편의 저자 다윗입니다.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을 천주교회와 개신교회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1968년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공동번역 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1977년에 나온 한국교회의 공인 성경책입니다.
지금은 천주교회도 그리고 개신교회도 외면하고 있는 공인성경이 되었지만 특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다시 주목해야할 공인성경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꼭 구입해서 읽어 보시기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거기에 보면 시편 23편 1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23: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 이지요.
여러분 이 고백의 찬양이 언제 터졌는지 아십니까?
다윗의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입니다.
죽고 싶을 만큼, 인생의 밑바닥 중에 밑바닥을 칠 때입니다.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5절 내 원수의 목전
예사롭지 않은 이 두 가지 표현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큰 시험 속에 처해져 있었는지를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이 없습니다.’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할 만한 가장 큰 어른 한 분을 꼽으라면 김수환 추기경일 것입니다.
돌아가셨지만 이견이 없지요.
그런데 그 분의 묘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편 23벌 1절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 이지요.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 하면 떠오르는 또 한 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사도직을 조롱하며 박해하는 자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빌립보서 4장입니다.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배부름과 배고픔 그리고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가졌던 바울 사도의 진면목이었습니다.
자, 이제 복음서에서 한 번 찾아봅시다.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했을 때 어떤 인물이 떠오릅니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입니다.
‘시므온’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이히 하베 게누크’라는 곡을 만든 배경 인물이기도합니다.
유태인 풍습에 따르면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고 40일이 되면 갓난아이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또는 어린 집비둘기 둘을 번제 드리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풍습이 예수님 시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2절에 나오는 정결 예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해 마리아가 40일이 지난 갓난아기 예수님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을 때, 그 때 이들 모자를 처음으로 영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시므온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 자 곧 메시야 오기를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늙은 이었습니다.
그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한 고백이 ‘Ich habe genug(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
누가복음 2장 29절입니다.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29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2: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히 하베 게누크, 그래서 나는 만족합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않은 시므이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참 안타가운 이야기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의 만족함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불신앙입니다.
신앙의 힘, 그 신앙의 역동적인 성숙함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라는 자족할 줄 아는 은혜이지요.
‘그래 참 좋다. 아쉬울 것이 없다. 주님의 은혜지’
여기에 신앙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다 보면 인간적인 아쉬움이 들어오게 되고, 인간적인 아쉬움이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배하다 보면 큰 시험에 들게 되고, 큰 시험에 들게 되면 날마다 생명을 품고 자라야할 우리의 신앙은 멈추게 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스칸달론’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실족’인데 신앙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예기치 못한 시련, 곧 광야라는 현실에 부딪치게 됩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라는 강력한 하나님의 보호 장치, 안정장치가 있었지만 광야가 주는 인생의 무게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물이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에게 필요한 물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출애굽은 물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당도한 곳이 수르 광야였는데 거기서 ‘마라’라고 하는 큰 샘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사람도 짐승도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변하는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라의 기적이후 그들이 찾아 간 곳은 ‘엘림’이었습니다.
‘대추야자나무’ 우리 성경에서는 종려나무로 번역되었는데, 대추야자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엘림’입니다.
대추야자나무 숲이 우겨질 정도이니 얼마나 물이 흡족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서 오래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오아시스 ‘엘림’에서 목 축이는 정도 있게 하시고 다시 물 없는 광야, 신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 때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출애굽기 16장 1-2절입니다.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2절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원망했을까요?
첫째, 먹을 음식 곧 식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언제인가하면 출애굽이후 보름이 지났을 때입니다.
탈출할 때 준비해온 음식이 다 떨어졌을 때입니다.
더 큰 문제는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망하지요.
그리고 옛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좋았는데....’
‘적어도 배는 골지 않았는데....’
이런 아쉬움이 모세와 아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이 문제를 아주 깔끔하게 해결해 주십니다.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만나와 메추라기로 해결해 주십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으로 이 문제를 아주 깔끔하게 처리해 주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지요.
1.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2.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3. 한없는 축복을 우리게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두 번째로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물 때문입니다.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17: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보통 큰 문제가 아니지요.
신 광야를 벗어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큰 시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옵니다.
바로 마실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없었습니다.
심지어 짐승마저도 마실 물이 없었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대들지요.
모세에게 대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요구합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의 지도자라면 그 지도자임을 입증해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입니다.
바로 물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서 물을 내는 것을 통해서 당신의 지도력을 스스로 입증해 보라.’ 는 것입니다.
모세 입장에서 보통 남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그 때 모세는 다소 격양된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
여기에 보면 모세가 두 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첫째,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둘째,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십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왜 여호와의 능력을 시험하는가?’ 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리고 아침에는 만나와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 같이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광야에 내 쳐진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자나 깨나 입는 그런 존귀한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지 안 계신지, 그 분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는 거십니다.
‘나와 다투지 말라’ 그리고 ‘여호와도 시험하지 말라’
7절입니다.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다투다)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대들었으며)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결국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모세는 자신의 지팡이로 호렙산에 있는 반석에서 생수를 내는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흥미로운 것은 이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출애굽기 기자는 입을 꾹 다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기적의 샘물 앞에서 기뻐하는 백성들의 모습과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원망할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 겹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기자는 6절 이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떻습니까?
시므이처럼 ‘이히 하베 게누크, 나는 만족합니다’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도 남 탓이나 하면서 원망 속에서 살아가십니까?
두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첫째, 남 탓이나 하면서 서로 다투지 마십시오.
다투는 인생 ‘므리바’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지 안 계신지, 그 분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