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8-16 사랑에 맥 못 추시는 하나님
사랑에 맥 못 추시는 하나님
창세기 4:8-16절 2016/11/20(왕국주일)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 하나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녹색이었던 강당보가 흰색으로 바뀌었는데 오늘이 교회력으로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이면서 동시에 교회력의 끝인 왕국절 또는 왕국주일입니다.
왕국절(왕국주일) 좀 생소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왕국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면 그리 낯설지도 않은 말이 왕국이라는 단어입니다.
왕국, 어떤 임금(어떤 왕)이 다스리는 왕국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Kingdom – tide’라고 부릅니다.
타이드(tide), 밀물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그 주기도문에서 첫 번째로 간구한 기도의 내용이 이루어진 상태가 바로 ‘Kingdom – tide’ 왕국 주일입니다.
찾아보겠습니다.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라는 간절한 우리 주님의 소망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진 상태가 바로 왕국주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 절기의 끝에 왕국주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국주일은 우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왕국주일이 올 때마다 지난 1년간 우리의 신앙을 결산하는 날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자기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지요.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①땅과 하늘(천지 창조의 순서와 반대)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②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일명 ‘백 보좌 심판’을 다르고 있는 본문입니다.
최후에 있을 ‘백 보좌 심판’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꼼꼼하게 점검해 보는 날이 바로 왕국절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삶이 천국에 들어갈 알곡들로 가득하신지요.
예배의 알곡, 말씀의 알곡, 기도의 알곡, 헌신의 알곡, 사랑의 알곡, 전도의 알곡, 감사의 알곡, 기쁨의 알곡으로 가득하신지요.
아니면 모양만 그럴듯한 남의 눈만 속이는 쭉정이인지요?
스스로 꼭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Inward내적으로 좀 더 진실하고 Outward외적으로 좀 더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교회의 절기 즉 교회력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교회의 절기, 교회력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절기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기준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고 그리고 절기를 지키는 목적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잘 분별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이미 죽은 안상홍을 하나님 아버지로 여기고 그의 부인을 하나님의 어머니로 여기는 ‘하나님의 교회’가 전통 기성 교회를 향해 ‘왜 너희들은 맥추절을 지키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느냐? 왜 성경대로 말씀을 지키지 않느냐?’ 또 ‘성경에 절기로 등장하지 않는 성탄절을 왜 태양 숭배일인 12월 25일에 지키느냐?’ 시비를 걸어도 속 시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교의 절기인 교회력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의 기준이 무엇인지?
교회력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력을 지키는 목적이 무엇인지? 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시 정리합니다.
교회력의 중심 교회력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생애가 그 중심이고 그 기준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달력 곧 태양력과 음력은 농사(농업)를 중심으로 짜여 져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력은 먹고 사는 일 곧 농사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한 그리스도 사역을 중심축에 두고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유대인의 3대 절기 즉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그리고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인 24절기 모두 먹고 사는 일인 농사와 연관되어있지만 교회력은 다릅니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의 일생이 중심축입니다.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
그리스도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가 소망하고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밝히는 것이 바로 교회력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은 이러한 질문들을 기초로 해서 일곱 절기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다음 주일이지요.
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강림절’입니다.
첫째, ‘강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로 기다릴 ‘대待’자를 써서 ‘대강절’ 또는 ‘대림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둘째,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의 왕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성탄절’입니다.
셋째,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 아들의 호칭을 부여받고 공생애를 처음 시작한 ‘주현절’입니다.
넷째, 40일간 고난당하신 ‘사순절’
다섯째,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
여섯째, 교회의 탄생인 ‘성령강림절’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예수님은 그 날이 도둑처럼 임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좀 순화해서 표현한 밀물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나라 ‘Kingdom – tide’ 왕국절입니다.
이렇게 일곱 개의 절기로 구성 된 것이 교회의 절기, 교회력입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처럼 그리고 우리나라의 세시풍습처럼 먹고 사는 일 곧 농사가 중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생애가 중심입니다.
이것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달력, 교회력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2017년도 새해 달력을 받으시면 그림이 이렇다 저렇다 크기가 이렇다 저렇다 불평불만 하지 마시고 꼭 교회력을 체크하셔서 여러분의 신앙 성장의 도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질문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교회력은 강림절을 시작으로 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왕국절 이렇게 일곱 개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중에서 가장 긴 절기는 어느 절기 입니까?
성령강림절입니다.
52주 중 무려 27주입니다.
절반이 넘습니다.
절반이 넘는 성령강림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령과의 교제, 성령과의 연합, 성령과의 일치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 시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총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걸어온 삶의 길이 아름다우셨는지요?
그 감동과 그 기쁨이 우리 안에 감사로 남아 있는지요?
그래서 준비한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담겨진 첫 번째 성경책 창세기입니다. 우선 제목을 보시지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사랑에 맥 못 추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제가 창세기를 통하여 발견하고 경험했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창세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11장 인류의 기원과 원역사(모든 역사의 뿌리)
12장-36장 족장들(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
37장-50장 요셉의 이야기
특히 이 중에서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창세기 1장-11장에 기록된 인류의 기원과 모든 역사의 뿌리를 담고 있는 원역사입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역사의 뿌리 속에 다음과 같은 패턴이 거듭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 곧 죄입니다.
둘째, 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
셋째, 이 부분이 아주 독특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데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입니다.
이러한 패턴이 모든 역사의 뿌리를 설명하고 있는 창세기1-11장에 거듭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먼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아주 특별하게 지으십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또한 당신의 숨(루하흐, 생기)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유일하지요.
뿐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누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요.
사탄의 의해 흔들린 아담과 하와가 결국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만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형벌이 인간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해서 모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그리고 모든 남자는 땀 흘려 수고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된 것입니다.
죄의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요.
참 이상하지요.
그런 하나님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죄인인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가죽 옷을 입혀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형벌로 주어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도록 누군가의 피 흘림이 필요한 가죽 옷을 입혀 주었다는 것입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타락한 인간의 현실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입니다.
그래서 인생자체가 ‘苦’입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 속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담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Amazing Grace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결국 이 가죽 옷은 죄에 대한 심판 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나는 상징이 됩니다. 훗날 이 가죽옷은 어린양 예수 그리그도가 자기 몸과 살을 찢어주셨던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인의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패턴과 주제가 반복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신의 제사를 거부한 하나님에게 크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동생 아벨을 처 죽이게 됩니다.
그러니 공의의 하나님이 침묵할 수 없지요.
그래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찾아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십니다.
창세기 4:11-12절입니다.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4:12 ①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②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러자 가인이 이렇게 호소합니다.
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참 염치없지요?
남은 죽일 수 있어도 자신은 죽임을 당할 수 없다는 인간의 몰염치
가관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가인의 호소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두려워하는 가인을 향해 ‘가죽 옷’처럼 하나님의 보호를 뜻하는 ‘표’ 하나를 주십니다.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 뿐만이 아닙니다.
노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인간의 죄악은 최악에 달합니다.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던지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창세기 6장 11-12절
6: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부패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세 번 나옵니다.
히브리어 어법에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대 강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세상이 썩었고, 땅이 썩었고 그리고 그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최악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홍수 심판으로 노아의 식구를 제외하고 모두 죽게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역시 표시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지개입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지개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바벨’이라는 도시를 세우고 하늘에 닿도록 높은 탑을 쌓아 올립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함이 탑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흩어 놓으심으로써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킵니다.
그런데요.
창세기 11장 10절 이하를 보십시오.
바벨탑 이야기에 이어 누구에 대한 족보 이야기가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셈의 족보입니다.
그리고 그 셈의 족보의 끝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약속의 증표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선물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처럼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해서 11장까지 면면히 흐르는 주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에 맥 못 추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입니까?
바로 죄인 된 나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고백을 자신의 노래로 남기게 됩니다.
시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찬양 드리겠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