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강해 3장1-12절 말에 실수가 없는 자
말에 실수가 없는 자
야고보서 3장1-12절 2016/9/7(수)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3: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학적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마치 강의 원고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흩어진 교회에 보낸 야고보의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야보고의 편지’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편지 형식의 글이지요.
하지만 야고보를 자세히 읽어보면 안부를 전하는 편지의 느낌 보다는 마치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는 강의 형식의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까 종합하면 강의 형식의 편지이지요.
강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바로 잡는 것이 강의의 주된 목적입니다.
문제는 강의 시간입니다.
제대로 가르치고 그리고 올바르게 바로 잡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편지의 특성 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보고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편지를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약과 그리고 그에 따를 적절한 설명을 위해 은유적 비유를 사용하게 됩니다.
‘요약’과 ‘은유적 비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야고보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지금 야고보가 무엇을 요약해서 가르치고 있는지 그리고 둘째, 그 요약한 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무엇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약’과 ‘은유적 비유’입니다.
두 번째로 야고보서가 가지고 있는 글의 특징이 있습니다.
앞의 것과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야고보는 ‘요약’을 위해 ‘-하라’라는 식의 명령형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야고보서는 5장으로 된 비교적 짧은 책입니다.
절수로는 108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중 54절이 명령형입니다.
딱 전반이지요.
이처럼 야고보가 마치 모세의 율법서처럼 ‘-하라’는 명령형식의 매우 강한 어조로 성도들에게 권고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가 처한 매우 어렵고 불리한 상황들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 곳에 흩어진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시험들 때문입니다.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여러 가지 시험’
이 두 가지의 표현만 봐도 당시 교회들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담임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 뿐 만 아니라 시리아 안디옥교회, 시리아 다메섹교회, 바벨론교회 그리고 소아시아에 흩어진 여러 교회들이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아주 큰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아주 단호한 어조인 명령형의 편지로 성도들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1장 2절입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명령형.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형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이 구약의 율법서입니다.
‘-하라’ 248개의 긍정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말라’ 365개의 부정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합치면 613개의 율법이 완성되게 되는데, 이 율법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받습니까?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라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초대교회 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명령형, 거기에는 명령을 받는 이의 해석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명령의 의도가 무엇이지?’
‘왜’
이렇게 따져 묻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오직 순종입니다.
그냥 명령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하루 빨리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문학적 특징입니다.
세 번째 야고보서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특징은 역시 첫 번째 것과 연결되는데 명령에 따른(요약이지요) 은유적인 비유가 적절히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설교 후반부에 가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야고보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학적 특징들이 종합적으로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본문이 바로 3장입니다.
야보고는 위기에 처한 교회를 향하여 먼저 이런 고백으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아주 간결하지만 아주 강력한 명령입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우선은 야고보 자신이지요.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 곧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명령입니다.
가르치기 전에 자신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첫째, 가르칠만한 것이 있는지(은혜의 확실한 증거들이지요)
둘째, 가르칠만한 자격이 있는지(덕이지요)
항상 묻고 또 묻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는 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이들 곧 선생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학생은 누가 판단합니까?
선생님이 합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이 곧 선생님은 누가 판단합니까?
더 큰 심판권과 더 큰 판단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의 명령입니다.
선생 된 너희가 더 큰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 큰 심판을 받는 자리에 있는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서로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가르치는 공동체가 아닌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이란 진정한 선생이란 자신의 가르친 말을 넘어 자신이 가르친 대로 자신의 몸으로 기억하고 자신의 삶에 믿음의 흔적을 남기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 제 성경책 속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가르치려 하지 말라.
회개시키려 하지 말라.
개혁하려고도 하지 말라.
가르침을 받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스스로 개혁하라
야단맞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큰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특히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분이라면 우리 모두가 곱씹고 또 곱씹을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자신도 남을 가르치는 선생에 위치에 있으면서도 선생이 되려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그 다음절에 나옵니다.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왜 우리가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를 조심해야하는가?
실수이지요.
특히 말에 대한 실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에 대한 실수란 그저 실수로 잘못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무지해서 범할 수밖에 없는 말의 실수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주로 교회 지도자들이 행하는 말에 대한 실수란 행함이 없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말, 자신도 행하지 않는 가르침이지요.
그 말에 대한 실수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교회 지도자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말에 대한 실수가 없는, 다시 말해 자신이 말하거나 가르친 것과 자신이 행한 것이 일치가 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의 은유적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말에 재갈을 물리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말에게 재갈을 물리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순종입니다.
주인의 말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혀에 재갈을 물어야 하는가?
우리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순종의 재갈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재갈입니다.
순종의 재갈을 물고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랴’하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뎌뎌’ 하면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써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혀가 물어야할 순종의 재갈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야고보는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첫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긍휼과 자비이지요.
남에게 베푸는 친절을 말합니다.
두 번째,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순결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입에 물려 있어야할 순종의 재갈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말수를 줄이고 말조심하라는 그런 소극적인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야보고가 언급하고 있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말과 행함이 일치가 되는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순종의 재갈을 물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리고 둘째,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세속으로부터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에 실수가 없는, 다시 말해 자신이 말하고 가르친 것과 자신이 행한 것이 일치가 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은 ‘키’를 통제 하는 것입니다.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배의 키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물 밑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크기도 지극히 작습니다.
하지만 배의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 바로 그 작은 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스려야할 ‘키’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의지’입니다.
사공의 마음과 뜻이 배의 ‘키’에 전달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뜻이 전달되는 곳이 바로 ‘의지’입니다.
그 ‘의지’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5절, 자랑함 없이.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입니다.
이것 역시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첫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곳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순결한 믿음을 지키는 곳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말에 대한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킵니다.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3: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한 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그 말이 찬송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단 물이 될 수도 있고 쓴물 곧 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 말로만 가르치려는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말에 실수가 없는 다시 말해 자기 말에 책임을 다하는 온전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