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3-47 칭송받는 교회
칭송받는 교회
사도행전 2:43-47절 2016/8/26(금)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피처(pitzer)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필 주커먼이 책을 하나 썼습니다.
제목은 ‘신 없는 사회(마음산책,2012)’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도전적인 제목이지만 한 번 정도 제목이 주는 편견의 눈을 거두고 꼭 읽어 볼만한 책입니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중 누가 더 괴로워할까?’
객관적인 수치는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더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좀 의외이지요?
이유는 교회가 늘 가르쳐왔던 심판과 죄책감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교인 중 상당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천국에 가지 못할까 봐 걱정하며 죄책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반면 하나님도 천국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도 천국과 지옥도 믿지 않으니 그에 따른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덜 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의 죽음처럼 그저 자연의 이치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합니다.
죽음에 대한 순응이지요.
이번에는 질문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 저자는 묻습니다.
특정 종교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중에서 도덕성이나 윤리성이나 청렴성이 더 높은 사회는 어디일까요?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해서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또 전 국민이 불교 국가라고 해서 더 청렴하고 더 도덕적이고 더 윤리적인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기존 종교사회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회가 더 부도덕하고 더 비윤리적이고 더 비이성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 없는 사회’ 다시 말해 종교가 없는 사회라 할지라도 어느 특정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 못지않은 청렴성과 도덕성 그리고 이성적이라는 것입니다.
필 주커면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덴마크와 스웨덴의 사례를 주목합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유럽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최고의 복지를 자랑하는 부유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아주 빠르게 비기독교적인 사회로 변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과거 신이 있는 사회나 현재 진행 중인 신이 없는 사회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덴마크와 스웨덴, 지금도 ‘교회세’를 내는 나라입니다.
신앙은 없지만 전통에 따라 지금도 자발적으로 교회세를 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결혼식과 장례식 역시 교회에서 행하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습니다.
다닌다 해도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만 기독교 국가이지 우리처럼 주일성수해 가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검사로 일하는 크리스티안은 저자에게 자기 친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몇 해 동안 친밀하게 만나왔던 친구가 어느 날 파티에서 포도주에 취한 후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고백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 하나님 믿는다.”
그 고백에 크리스티안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 정신 나간 친구가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당혹스러워하는 크리스티안에게 술에 취한 친구가 다시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줘.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신앙의 죄를 술에 힘을 빌려 말한 것뿐이야.”(필 주커먼, <<신 없는 사회>>, 97쪽)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유럽교회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를 해 봅시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연구하기 위해 외국인 학자가 아주 모범적인 대형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논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열熱(뜨거움)은 있지만 빛은 없다.”
조금 성급하고 오만한 판단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을 대표하는 한 신학자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도발적인 주장인데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국 교회는 예수를 ‘기념’만하고 있지 예수로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새겨볼만한 이야기지요
여러분은 교회의 교회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종교를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고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만 있으면 건물이 있든 없든 크던 작던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행전이 전하는 교회공동체의 탄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시작, 교회의 탄생,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분되고 놀랍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전에 없었던 공동체가 새롭게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산당도 성전도 회당도 아닌 다시 말해 특정 건물(특정 사제) 중심의 공동체가 아닌 사람중심의 공동체가 새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절 이후, 사람중심의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놀라운 일과 많은 표징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는 오순절에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한 사건입니다.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보리를 추수한다고 해서 다른 말로는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그 추수의 날에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신비 중에 신비이지요.
기적 중에 기적이지요.
하늘을 보좌로 삼고 계서야 할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은 인간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신비 중에 신비이고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두 번째는 갈릴리 사람들이 한 번도 가보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은 나라의 말을 각자 다르게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방언의 역사입니다.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언과는 많이 다르지요.
갈릴리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120명의 갈릴리 사람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번도 배우지 않은 방언(다른 나라 말)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세 번째 기적입니다.
제가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세 번째입니다.
어떤 기적입니까?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①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2:45 또 ②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2:46 ③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④집에서 떡을 떼며(나누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먹고
2:47 ⑤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⑥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⑦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새로운 공동체 바로 교회의 탄생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일곱 가지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부한 자나 가난한자나 남자나 여자나 상전이나 종이나 차별 없이 이들 모두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일에 서로의 차이를 넘어 일치를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커뮤니온’
형식에 사로잡힌 ‘예전 공동체’나 인도자에 따른 ‘예배 공동체’ 아니라 너와 나가 없는 높은 자나 낮은 자가 없는 ‘사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리고 둘째는 이웃과의 ‘사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요?
아주 낯설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가혹한 세금 정책으로 말미암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형편에서 서로의 삶을 경축한다는 것,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 자신의 전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 그리고 나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기억해서 밥 한 숟가락을 덜어내며 산다는 것, 또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품어 안고 산다는 것.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사심 없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아마 이런 행동들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주 낯설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런 초대교회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다시 27절입니다.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2: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첫째,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둘째,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47)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가야할 길이고 오늘 우리가 기도제목으로 삼고 반드시 기도해야할 기도의 내용입니다.
첫째,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주는 교회’
그리고 둘째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있는 교회’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참된 교회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 마음에 위로를 주고,
세속적인 행복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있다는 것을 맛보게 하고,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가는 길벗들을 만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교회.
그 교회가 우리교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바라기는 이 꿈을 놓고 기도하는 이 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