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3:11-18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는 지식
베드로후서 3:11-18절 2016/6/12(주일오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던 김기원 교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2012년 3월 22일 한겨레신문에 칼럼 하나를 기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칼럼에서 현재 우리나라 국민이 느끼는 어려움을 세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입니다.
첫째 고단함입니다.
'고단함'이란 생산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그리고 진급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 정도는 포기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실제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걸린 급훈입니다.
‘우리 엄마도 계모임에서 말 좀하게 하자’(남해제일고)
‘맑은 공기는 노후에 마시자’(강릉여고)
최근에는 이런 급훈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
‘10분 더 공부하면 남친 차종이 바뀐다’
‘개 같이 공부해서 정승같이 놀자’
일상에서 주어지는 사소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자꾸 미루어 놓고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혹, 인생의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인생 자체가 고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억울함입니다.
억울함이란 1차 분배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임금 격차가 아직도 상당합니다. 노동의 강도나 긴장감이나 위험성은 다 똑같은데 노동의 대가 곧 임금의 격차는 아직도 큽니다.
그러니 억울하지요.
고위직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가 지금 뉴스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 집사님인데 1년 수입이 91억원입니다.
그분이 소유하고 있는 수익형 부동산이 123가구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니 상대적인 박탈감과 그에 따른 깊은 상실감은 우리로 하여금 억울함이라는 분노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경제적 차별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불안함, 미래에 대한 불안함입니다.
2차 분배과정 곧 복지의 문제입니다.
상당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회적 약자가 처한 미래의 불안감은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들, 즉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라는 이 세 단어로 우리의 삶을 접근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세상이 없는 가치가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 복음의 가치입니다.
그 복음이 부요함으로 그리고 평안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저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처한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라는 현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무게의 버거움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시면 산상설교에서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좀 낯설지만 이런 삶의 방식들을 제시하십니다.
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보셨나요?
무엇을 버려보셨나요?
나의 욕심이나 알량한 의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버려보셨나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입니다.
지금 애통하고 있습니까?
울며 씨를 뿌리고 있습니까?
내 신세타령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애통하고 있는가? 입니다. 주님의 모된 교회를 보면서 얼마나 애통하고 있는가? 입니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 곧 하나님의 손에 길들여져 있습니까?
4. 의에 주리고 목마를 자는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를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명의 양식, 생명의 물로 여기고 그것을 먹고 마시고 살아갑니까?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긍휼이 여기는 자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살아가는지요?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서 우리 안에 꿍꿍이가 아니라 그리스도만 보여 지는지요?
7.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을 깨는 원수를 내 옆에 두고 내 몸처럼 사랑하는지요?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중에서 하나라도 여러분의 인생 길, 삶의 방식이 되고 있는지요?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요.
어쩌면 흉내 내는 것조차 버거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들과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팔복 다음에 나오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꼭 유념하시기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가 쓴 두 번째 편지’라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가 편지를 그것도 두 번씩이나 연이어서 쓸 수밖에 없었던 초대교회의 긴박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빈번하게 읽어났던 박해와 괴롭힘입니다.
팔복 중에서 마지막 8번째 해당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일’입니다.
박해와 괴롭힘
이것이 일상이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마냥 참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힘겨운 나날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승천하신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굳건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maranatha)’의 신앙입니다.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박해와 괴롭힘이 일상이 된 현실 속에서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이 자꾸 지연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끝도 없이 지연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해소할 길은 오직 믿음 하나뿐인데 그 믿음마저 주님의 재림이 자꾸 지연되자 여기저기서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욱 이들을 힘들게 한 것은 세상의 조롱입니다.
오직 믿음 하나 붙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은 이렇게 비웃습니다.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약속은 어디 갔느냐?’
‘세상의 끝이 왔다고 너희가 떠드는데, 그 종말의 때가 언제 인가?’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 있는데 도대체 너희들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입니다.
그러자 굳건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 틈을 타서 그들의 연약한 마음을 파고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표현하자면 이단들입니다.
당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노린 거짓교사들 즉 이단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유대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의 주장으로 다시 모세가 정한 율법주의로 회귀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자유입니다. 구원입니다. 그리고 해방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도 중요하지만 유대인의 전통과 관례를 무시할 수 없으니 할례 그리고 음식 규정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이 가르침에 빠지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노시스’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여기서는 구약성경) 필요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어록: 구전복음) 필요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신학, 교리) 필요 없다.’
오직 하나, 자신들처럼 신비한 영적 지혜를 얻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문제는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다 보니까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이 가르침에 상당히 많이 빠지게 됩니다.
‘혹 그곳에 가서 물으면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미련한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같은 성격을 가진 베드로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거짓교훈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들로부터 교회를 든든히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이 직접 나섭니다.
그렇게 해서 기록 된 것이 베드로 전서와 후서입니다.
베드로는 우선 초대교회가 처한 가장 큰 숙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재림의 지연 문제입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를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설명하지 않고는 거짓교사들의 가르침과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재림의 지연 문제를 설명하면서, 그에 앞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하는 이유를 성경을 근거로 밝힙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하는가? 성경적 근거들입니다.
2장 4절입니다.
2:4 하나님이 범죄 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천사라 할지라도 범죄 한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2장 5절입니다.
2: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 시대 하나님의 심판을 보라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은 멸망했지만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와와 그의 일곱 식구는 홍수 심판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2장 6-7절입니다.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속에서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은 잿더미 속에서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듭니다.
불의의 삯을 좋아했던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입니다.
2: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2: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불의의 삯 곧 돈을 사랑하고, 불법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의 행동을 누가 저지했다고 합니까?
말하지 못하는 나귀를 통해서 거짓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하나님이 저지했다는 것입니다. 좀 표현이 과격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지만 불의에 대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어느 시대든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고 그 심판으로부터 자기 백성 곧 의로운 자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붙들려는 태도 곧 의로움이 있는 자만이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처럼 그리고 의로는 롯처럼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붙들려는 태도 곧 의를 가진 사람만이 구원에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알곡과 쭉정이를 하나님이 가려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좋은 일 자꾸 지연되는가? 입니다.
왜 주님의 재림이 자꾸 지연됩니까?
베드로의 설명입니다.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천하보다 귀한 한 심령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
인애하심입니다.
그래서 심판 날을 자꾸 유예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비오니 / 죄인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가비오니 / 죄인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이처럼 죄인 된 우리들이 돌이키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이 인내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릇된 이들을 행한 즉각적인 징계가 지난 천년동안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인애하심으로 재림이 지연되는 시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입니다.
첫째, 11절과 12절입니다.
3: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3: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팔복 다음에 나오는 소금과 빛의 삶 곧 착한 행실입니다.
그것만이 그 날을 앞당기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13절입니다.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의가 있는 곳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 14절입니다.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성화, 성결입니다.
우리 주님이 새롭게 제시한 삶의 방식 곧 팔복과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18절입니다.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우리의 주요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이 아주 흉흉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누가복음18장 8절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첫째, 의로운 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하나님의 날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의로운 자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는가? 입니다.
그러니 의로운 자의 원한이 풀어지고 악인이 심판하는 날.
그 마라나타의 신앙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란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종말에, 심판 날)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러한 주님의 탄식이 나오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지요.
자신이 없으면 기도하세요.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지만 그 믿음만큼이라도 지켜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