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12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
로마서14장 1-12절 2016/03/09(수)
사도 바울의 또 다른 편지인 고린도전서 1장 2-3절을 보면 그의 인사말 속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설명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교회란 안상홍이 세운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기인하는 하나님께 속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1863년 11월 19일 게트지버그에서 아주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입니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것을 그대로 차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교회입니다.
‘church of the God, by the God, for the God’
서방그리스도교의 뿌리인 천주교회는 베드로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반면 동방그리스도교는 도마에 의해 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동방 그리스도교의 수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도마입니다.
감리교회는 웨슬리가 세웠고, 장로교회는 칼빈이 세웠다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의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 하나님이 친히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주로 두 가지의 모임을 주도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따르면,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을 형성하게 됩니다.
거룩하여지도록 부르심은 입은 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라는 말입니다.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거룩하여지도록 부르심은 입은 자들의 모임, 그 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대속의 구원 즉 죄 사함의 구원과 함께 고민해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입는 성숙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조롱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입는 성숙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오직 죄 사함의 구원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개인주의라는 이기주의라는 세상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고 정의하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교회란 죄 사함의 구원을 넘어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입는 성숙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 곧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정의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교회란 무엇인가?
1장 2절 후반부부터 읽겠습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이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우리의 유일한 생명, 우리의 유일한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갖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오직 예수입니다.
따라서 시대와 장소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모든 모임을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땅 사고 건물 짓고 간판 세운다고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의 고백이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양한 형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천주교회,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회, 침례교회, 구세군, 오순절성회 등 다양한 형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사랑의 표현이 다르듯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표현 또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정의를 모르면 교회 분열, 또는 교파의 분열로 오해하게 됩니다.
오히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에클레시아, 교회’와 혼재하여 사용하고 있는 바로 ‘성전’의 개념입니다.
‘교회와 성전’, 사실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이 두 단어를 혼재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특히, 성전이라는 말을 쓸 때는 조심 또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전’이라는 말 뜻 그대로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전(집), 성전은 오직 한 곳뿐이었습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또는 솔로몬이 지었다고 해서 솔로몬 성전이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또는 훗날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다시 지은 것과 구별해서 제 1성전이라고도 부릅니다.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유일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성전은 단 하나 예루살렘성전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돈이 없어서 다른 곳에 성전들을 세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유대인들이 우리보다 신앙적 열심이 없어서 다른 곳에 성전을 세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시온 산에 세워진 예루살렘성전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유일한 성전이 무너져 그 터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집터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성전을 회복할 자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우리의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기며 따르는 이들의 무리가 많아지자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성전 모독죄로 고발하고 심판한 것입니다.
‘헤롯의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이 성전을 다시 짓겠다.’라는 예수님의 예언적 말씀을 꼬투리 삼아 성전 모독죄로 고발한 것입니다.
물론 성전 모독죄만으로 대 제사장 가야바 법정에서 충분이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 제사장 가야바가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칭 그리스도로 몰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로마의 형틀인 나무 십자가에 달여 죽이는 것을 통하여 그가 성전을 세우는 그리스도 아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으로 몰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계산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주도하게 됩니다.
물론 이 일에 배후에는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주도하심이 있었다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지만 ‘성전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성전’에 대한 긴장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반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바울을 비롯한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어디입니까?
그들에게 성전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 곧 성령을 모신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연약한 몸을 하나님의 성전을 삼으신 분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 성전 된 우리의 육체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한 하나님의 성전 된 이를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문제를 다르고 있습니다.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의 다양한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신앙의 다양한 형태들은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거하는 집, 곧 하나님의 성전으로 그들을 삼고, 그들 안에 성령을 주셨으니 나와 좀 다르다고 비판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고기 먹지 않고 콩만 먹고 채소만 먹는다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가하지만 그들이 택한 성화의 길을 존중하고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술 담배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다양성.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너무 경직된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아주 심합니다.
그래서 내용보다는 어떤 형식에 있어서 조금만 달라도 경계하는 무시하고 심지어는 이단취급까지 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늘 조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받으셨고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속의 피가 차별 없이 그들에게도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거룩한 성도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 행하는 경건의 생활에 있어서 두 가지 양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가한 부류입니다.
경계가 없지요.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반면 또 한 부류는 특정 음식이나 행동을 절제하는 부류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이지요.
이 때 교회는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하는가? 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 교회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 업신여기고 비판하다가 그냥 갈라질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까?
다시 3절입니다.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이 이미 그 사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았으니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날’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14: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각자 믿음대로 확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염두 해 두어야 할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믿음이 강하여 모든 것이 다 가하다 할지라도 이 사실 하나만큼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이 사실만큼은 늘 염두 해 두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각자가 처한 개별적인 문제는 당사자인 그 자신의 믿음과 그 안에 계신 성령에게 맡기고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만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이고 이것이 교회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다양성의 사회만큼 요즘은 신앙의 형태도 참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말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
그러니 서로 비판하지 말고, 서로 이해하고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그러니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반드시 책임 있는 신앙의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서로 용납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