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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9: 14-33 약속 긍휼 주권

心貧者 2015. 10. 6. 10:38

약속 긍휼 주권

로마서 914-332015/9/23()

 

대장간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에 유대인 청년이란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유대인 청년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혈통으로 따지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핏줄 속에서 태어나 유대교의 가르침을 받은 전통 유대인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청년으로서의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 역시 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유대교 회당에서 할례를 받았고 그리고 유대교 회당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유대교 회당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유대교 회당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을 아주 강조합니다.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처럼 유대교 회당은 예수님의 중심 사역지로 철저하게 유대인으로 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낯설게 여깁니다.

그리고 외면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이 당시 민중의 언어인 히브리 아람 말을 사용했던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눈 감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누구인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백성을 선동하는 거짓 메시야라고 치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면 구약의 예언자가 언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마태는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고백을 투영시킵니다.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물론 지금도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 예수님을 거짓 선동 꾼 정도로 비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당시 유대사회에 흔하게 있었던 떠돌이 랍비 정도로 이해해 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고도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믿지 않았을까? 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 니고데모처럼 혹 그리스도가 아닐까, 혹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아닐까?

한 번 정도 고민해볼 만한 일인데도, 니고데모 외에는 이런 고민을 한 유대인이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민사상이라고 하는 그릇된 혈통주의 때문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혈통에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차별 없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모든 죄인을 품는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보다 앞세운 것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혈통입니다. 그래서 죄인들 특히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은 6.25전쟁 때입니다.

유엔 연합군 중에 유대인으로 전쟁에 참가한 것이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그 때 랍비들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에는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 회당이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유대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유대교를 전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할례의 증표가 있는 유대인에게만 미친다는 그들의 그릇된 편견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에는 타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유대교 선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 주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라는 혈통 속에 있다고 그들은 지금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그릇된 선민의식, 그릇된 언약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을 향해 조목조목 따지면서 구원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 꺼내서 비유를 둡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합니까?

에서입니까? 야곱입니다.

혈통으로 따진다면 장자 에서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장자 에서가 아니라 차자 야곱을 더 사랑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장자 에서를 사랑하지 않고 차자 야곱을 더 사랑했을까요?

바울의 답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맘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구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사랑할 수도 있고, 자기 맘대로 미워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 분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9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어떻습니까?

사실 이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기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구원할 수도 있고 구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하나님의 주권은 사실 우리에게는 썩 기분이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따져 묻고 싶은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바울은 에서와 야곱을 예를 들면서 유대인의 구원이 하나님 맘속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바울에게는 아주 큰 근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입니다.

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핑계 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동족 유대인들을 볼 때 마다 바울의 가슴은 찢어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그들의 미래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

끊임없이 기도하게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6절입니다.

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스라엘 구원에 있어서 바울이 첫 번째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이스라엘 속에서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에는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이 숨겨 있을 것이고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실행으로 옮기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이 아직 이스라엘 가운데 유효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 혈통이 완전한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 곧 구약성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구약성경을 보니 아브람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둘 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하지만 맏아들 이스마엘은 버림을 당하지요.

반면 둘째 아들 이삭은 약속의 자손이 됩니다.

이처럼 아브람함의 씨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확실한 성경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한 날 한 태에서 태어난 쌍둥입니다.

혈통으로 따지면 둘 다 구원 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고 상식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13절입니다.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맏아들 에서가 버림을 당하고 차자인 야곱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한 반면에 에서는 미워했다 곧 사랑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이 깨달은 것 세 번째, 이스라엘 구원에 있어서 구원의 역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맘속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네 번째 바울이 이스라엘 구원에 있어서 깨달은 것은 이스라엘이 사명을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인이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가지고 있는 사명입니다.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3: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을 맡은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의 길을 닦도록 준비 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반드시 이스라엘 형통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 아브라함의 씨 가운데서 구원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명을 가진 이스라엘 모두가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는 사명을 완수 했다고 해서 그 개인 개인이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명을 받았다고 다 영혼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그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과 영혼의 구원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꼭 명심해야합니다.

 

오히려 사울에게 주어진 왕이란 사명이 하나님 앞에서 미움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스마엘과 에서가 받은 장자의 사명이 미움이 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이것이 동일하게 지금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맘에 선택 받은 자 만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11절입니다.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구원의 근거는 오직 하나,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맘입니다.

구원의 근거 오직 하나님의 맘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납득하기 아주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 특히 에서의 입장에서는 썩 기분이 좋은 말씀은 아닙니다.

왜 납득하기 어렵습니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이스마엘과 에서가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저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없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다는 것은 아주 불공평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간단합니다.

다시 14-16절입니다.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원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맘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도 하나님 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맘만 있으면 이스라엘 구원,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강박한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비유 하나를 더 드십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입니다.

17-18절입니다.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바로의 완악함처럼 지금 이스라엘의 완악함

이것 역시 하나님이 허락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구원에 있어서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겨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은 완악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의 때가 미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은 생소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한 가정의 자녀가 보통 7-8명 이었습니다.

그 많은 자식을 키운 부모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서 키워도 늘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자녀가 있는 반면에 정말 낳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자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집안 안에서 은혜를 아는 자식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아도 늘 감사하고 찬송하고 감격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가 매일같이 임해도 그 은혜를 모르고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느 편에 선 사람일까요?

은혜를 아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일까요?

그 기준이 바로 오늘 말씀 속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비록 질그릇처럼 천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릇 타령이나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지 않고 불합리하다 생각되면 아직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판단하셔서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시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