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이길 수 있을까?
로마서 6:13-23절 2017/10/22 성령강림 후 20주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일본이 사랑하는 작가 ‘엔도 슈사쿠’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할까합니다.
1923년에 태어나서 1996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늘 품고 있었던 신앙의 문제,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문제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표현했다는 것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공감과 사랑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들은 홍성사 출판사에서 출판 된 ‘침묵’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사해 부근에서’가 잇고 민음사에서 출판된 ‘깊은 강’등이 있습니다.
제가 ‘엔도 슈사쿠’를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 읽었던 ‘침묵’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입니다.
‘침묵’
이 작품이 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은 ‘하나님의 부재’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필요할 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시는가?’이지요. ‘왜 불의하고 악한 자를 심판하지 않고, 왜 의롭고 선한 자를 즉시 구원하지 않고, 침묵만으로 일관하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 ‘엔도’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의 문제’입니다.
그 중에서도 엔도가 주목한 것은 악입니다.
‘왜 이렇게 인간은 악할까?’ 이지요.
이 소설의 역사적 배경은 1637년,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도막부시대 인간이하의 삶을 살았던 하층민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영주가 착취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빈부와 귀천을 두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이처럼 급속도로 번진 그리스도의 복음은 에도막부시대에만 37만 명이라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냈습니다.
기적이지요.
물론 지방 영주들로부터 수탈을 당했던 하층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본 열도에 미친 그들의 영향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새로운 권력의 자리를 차지했던 ‘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볼 때 급속하게 번진 그리스도교가 그리 달갑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았거든요.
힘도 권력도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선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일본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다 추방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에 일이 벌어집니다.
교회를 향한 박해가 강력해 질수록 교회는 더 확산되고 부흥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고문’과 ‘회유책’이었습니다.
고문의 잔인함, 상상이상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당했던 잔인한 고문의 원형이 될 만큼 그 잔인함이라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황물 고문이었습니다.
배교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을 유황 온천으로 데려갑니다.
그런 후 옷을 벗기고 이유 불문하고 죽도록 패지요.
그렇게 깊게 패인 상처에 나면 뜨거운 유황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립니다.
그 고통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지요.
그래도 배교를 거부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돌에 매달아 온천물이 빠뜨려 익사시킵니다.
공포감을 심어 주는 것이지요.
또 이런 고문도 있었습니다.
로마인들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십자가형인데,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바닷가에 십자가를 세웁니다.
그런 후 배교를 거부한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매달아 둡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밀려드는 밀물에 의해 시달리다가 결국 죽지요.
그러면 뼈 한 조각도 남지 않도록 화장시킵니다.
아주 잔인한 고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양쪽 귀 뒤편에 작은 구멍을 냅니다.
온 몸을 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구덩이에 나무를 세워놓고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쪽 귀 뒤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립니다.
매달린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밤새도록 비명을 지르다가 서서히 죽어가지요.
물론 그들이 잔인한 고문만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회유책도 섰습니다.
바로 ‘후미에’라고 불리는 나무나 동판으로 만든 예수님 상을 밟으라고 회유하지요.
‘후미에’
거기에 발만 한 번 올려놓으면 그 지옥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것은 ‘순결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런 모진 박해 속에서도 남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일본인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가꾸레 기리시단’
‘지하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에도막부는 37만 명이나 되던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거나 또는 배교자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침묵’의 독자인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왜 이렇게 잔인하고 악할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잔인함, 인간의 악행은 이미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 만큼은 분명하게 밝히고 싶습니다.
악과 악인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뿔이 달린 것도 아니고요.
흉악하거나 괴팍하게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함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참 쉽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혜 자가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을 이렇게 밝힌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시편 1편 1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이처럼 악을 꾸미는 자리는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손쉽게 따 먹을 수 있듯이 악은 참 쉽습니다.
문제는 ‘침묵’이 주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 앞에 늘 놓인 악을 우리가 이길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를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합니다.
바로 창세기 3장 ‘원죄’아래 놓인 인간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원죄’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누구나 ‘죄의 종’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려하지만 늘 손해를 입을 때 마다 이런 갈등을 하게 됩니다.
시편 73편 12-13절입니다.(새번역)
73:12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73:13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도 무심하게 악을 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도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악의 도구 불의함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입니다.
새5:19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 베드로는 악에 대한 경고를 이렇게 까지 표현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입니다.
5: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그러니 사단의 도구 사단의 밥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에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원죄의 뿌리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악을 대적하고 악을 물리치고 악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보면 악을 이길 수 있는 한 가지 희망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인 17-18절입니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의 유일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종, 그분의 노예가 되었을 때 세상의 악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원죄의 뿌리를 두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유일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 거할 때 의의 사람, 의의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 13절입니다.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손, 발, 얼굴, 입술)를 죄에 내주어 불의의 무기 불의의 연장으로 삼지 말고 의의 무기, 의의 연장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과 화평을 이루는 의의 연장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행하는 의의 연장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가시가 되지 말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어떻게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을까?
죄가 우리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은혜아래 거하면 됩니다.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은혜 아래 거하는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의에 순종하는 아멘의 삶입니다.
불의에 순종하는 아멘의 삶이 아니라 의에 순종하는 아멘의 삶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악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 악을 대적할 때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지는 데 어떤 은사(카리스)가 주어지는가?
다시 23절입니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아주 깊숙하게 뿌리내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원죄’입니다.
그래서 죄와 악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묵’에 등장하는 배교자 선교사처럼 어쩔 수 없이 악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손, 발, 얼굴, 입술)를 죄에 내주어 불의의 무기 불의의 연장으로 삼지 말고 의의 무기, 의의 연장으로 삼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시편 1편 1절의 권면처럼 악을 꾸미는 자리에서 떠나십시오.
‘근묵자흑近墨者黑’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은혜아래 거하셔서 아멘의 삶을 사십시오.
손해가 난다 할지라도 의의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종이 되어 악을 대적하십시오.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마시고 남을 깔보고 놀리는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마십시오.
이것이 악을 대적하고 악을 물리치고 악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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