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에서 성소의 핵심은 메노라, 즉 일곱 가지 등잔대였다(출 25:31-40). 제사장은 아침마다 성소에서 이 등잔대에 신선한 기름을 부으면서 밤새 생긴 불똥들을 제거하였다. 이 작업을 하지 않았을 때 그을림이 생기며 성소가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바라본다. 성령의 새 기름이 매일 아침마다 부어지고 있는가? 매일 우리의 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 제거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을림 때문에 점점 어두워지고 있지는 않는가? 이 시대 신학생이라면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안고 2011년 2학기 ‘교회사 Ⅱ’ 수업(지도교수: 이덕주)에 참여한 우리 감신 신학부와 신학대학원 학생들은 한 달 동안 ‘종교개혁사’를 공부하면서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 감리교회와 신학교의 암담한 현실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거역할 수 없는 ‘내적 촉구’에 따라,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루터가 그리했던 것처럼, 루터의 종교개혁 494주년을 맞은 2011년 10월 31일 우리의 고민과 기도와 희망을 담은 95개 논제를 만들어 발표하는 바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 이는 믿는 자들의 첫째 되고 가장 큰 계명이다. 2. 진정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참 하나님만을 바라고 그분만을 섬기고 있는가? 그분 이외의 다른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3. 오늘 우리 안과 주변에서 발견되는 모든 오류와 잘못, 실수와 범죄는 우리가 우리 신앙의 정체성과 본질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을 벗어난 결과물들이다. 4.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범할 수 밖에 없는 탐욕과 이기심, 분쟁과 당파성 때문에 거룩해야 할 성도와 성직자,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5. 그 결과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거꾸로 타락하여 세상으로부터 걱정과 조언을 들어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구원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교회가 구원의 대상이 된 것이다. 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변할 수 없는 고백이요 희망이다. 7.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8.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는 성도의 삶과 교회와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9.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막 8:34, 마 16:24, 눅 9:23). 10.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은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십자가 희생과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11.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십자가 대신 번영과 성공의 기복주의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고 교회를 타락시킨 근본요인이 되었다. 12.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 대한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의 재확립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 교회에 대하여 ] 13.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14. 교회는 ‘만민의’, 즉 ‘모든 사람’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오늘 한국교회는 부자들에게는 편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겐 불편한 곳으로 바뀌고 있다. 15. 물질적 풍요를 행복으로 인식하는 사회 현실에 부응하여 교회는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의 구미에 맞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6. 교회는 양적 성장과 부흥을 위해 물질적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고, 헌금과 축복을 동일시하며, 성도의 신앙 척도를 헌금 액수로 측정한다. 17. 암묵적인 헌금 강요와 기복적인 내용만으로 채워진 오늘 부흥회는 더 이상 영적인 집회라 할 수 없다. 18. 온갖 명목의 헌금 봉투는 교인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고 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신앙생활까지 포기하도록 만든다. 19. 장로와 권사 등 교회 임원직 선출의 기준이 신앙과 성품이 되어야 함에도 경제적 배경과 헌금 액수가 조건이 되고 있다. 20. 그 결과 세상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자라야 교회 안에서 대접도 받고 중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돌게 되었다. 21.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정(定)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딤전 6:17)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무엇인가? 22. 루터는 로마 교황청을 향해, “면죄부 판매로 거둬들이는 돈이 교회의 보화가 아니라 가난한 성도가 곧 교회의 보화다.”라고 하였다. 가난한 성도들이 떠나가면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와 가치가 없다. 23.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명목 하에 교회 예배당과 시설을 지나치게 화려하고 호화스럽게 치장하여 가난한 교인들에게 위압감과 소외감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24. 교회와 목회가 더 이상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25. 또한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기도보다는 ‘기도 이외’의 행사와 프로그램에 집착하고 있다. 26. 교회는 근본적인 영혼구원 사역보다 성도를 끌어 모을 수 있는 흥미 위주의 프로그램을 계획·시행하고 오직 이러한 일들에 예산을 집중하고 있다. 27. 그 결과 교인들에게 진솔한 회개와 중생, 그리고 성화에 이르는 신앙의 근본적인 체험이 사라지고 대신 육신적 쾌락과 안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28. 예배마저도 사람의 눈과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기획, 실시함으로 마치 잘 짜여진 공연을 관람하듯 예배를 구경하는 교인들이 많다. 우리 예배의 목적과 대상이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29.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엡 4:12-15)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 30. “한 몸의 여러 지체”(고전 12:12)로 이루어진 교회의 공교회성을 상실하고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 의해 교회가 사유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1. 일부 목회자들이 “이 교회는 내가 개척하여, 내가 부흥시켰다.”는 생각에서 교회 재정과 관리를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은퇴 후에도 지속적인 간섭과 통제를 위해 목회 세습을 추진하여 물의를 빚고 있다. 32. 교회의 목회자 청빙과 위임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금전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중세교회의 성직매매와 다를 바 없다. 33. 교회는 더 이상 사람의 소유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소유다. 34. 교회는 “하나 되게 하시는”(엡 4:3) 성령의 은총 안에서 연합하고 일치해야 한다. 교회 일치는 권고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35.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는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갈라지고, 나뉘어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6. 같은 감리교단에 속해 있음에도 학연과 지연,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줄을 서고 편을 가르고 있으니 어찌 교인과 세상을 향하여 연합과 일치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겠는가? 37. 개인적, 집단적 이기주의로 인해 형성된 우리 안의 장벽과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고는 세상을 향하여 평화와 일치를 말할 수 없다. 38. 오늘 한국교회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부흥운동에서 일어났던 영적각성과 대화해운동을 다시 경험해야 한다. 형식적 집회가 아닌 내적인 체험으로 말이다 . 39. 진솔한 회개와 윤리적 갱신이 이루어진 후에야 교인과 교인 사이, 교인과 불신자 사이, 교회와 교회 사이, 교회와 세상 사이에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40. 이것만이 오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회복할 수 있는 길, 즉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 41. 교회의 목적은 선교이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이 땅에 임하도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도덕사교클럽도 아니고, 친목을 도모하는 동호회도 아니다. 교회는 입으로만 자폐적으로 구원을 고백하는 곳이 아니고, 값싼 위로를 남발하면서 천국의 보증수표를 발행하는 곳도 아니다. 교회는 우리의 나그네로서의 순례의 여정이 사막을 걷는 곳으로 비유하자면 쉼과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오아시스같은 공간이 되어야 한다 42. 또한 교회의 목적은 주님의 참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일상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삶을 살수있도록 훈련하는 데에 있다. 참된 제자는 반드시 참된 제자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불임목회라고 비판을 받을 정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자 하나 그들중에 참 제자로 접어드는 이들은 부재하다.
[ 목회자에 대하여 ]
43. 한국교회의 몰락은 목회자들의 몰락에서 기인된 바 크다.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 통찰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인격적인 감화력이 삼위일체가 되지 못함으로 몰지성주의가 조장할 수 밖에 없는 우매한 열정과 위선적인 바리새이즘이 고착화되어 작금의 한국교회의 몰락이 초래되었다. 44. 따라서, 한국교회의 몰상식과 비윤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신학적 훈련의 엄격한 재교육이 요청된다. 신학대학에서 배운 것과 목회현장에서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이분법의 논리 속에서 평신도들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되지 못하는 현실이 속출하면서, 적지않은 성도들은 가톨릭을 비롯한 타종교로 접어들거나, 교회쑈핑중독자로 소위 말하는 신앙의 전과자로 접어들고 있다. 45. 목회자의 소명의식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 됨”(딤전 1:1)에 있다. 46. 목회자의 사명은 교인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가꾸는데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 47. 목회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건강한 영성, 성화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48. 목회자는 말씀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 권위는 ‘엑수시아’(exousia), 즉 ‘본질로부터’ 나오는 힘과 능력이다. 49. 목회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 선포의 위임을 받았던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자세’로 강단에 서야 한다(사 6:5, 렘 1:6). 50. 목회자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성경 말씀을 끼워 맞추는 형식으로 설교해서는 안 된다. 51.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세속적인 관심사, 특히 정치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함으로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52. 마치 목회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과 저주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처럼 착각하여 강단에서 축복과 저주의 언사를 남발해서도 안 된다. 53. 설교시간에 특정 교인을 지목한 표적 설교로 성도를 시험 들게 해서도 안 된다.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재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54. 목회자는 강단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성경의 진리만 선포해야 한다. 55. 목회자의 권위는 강단에서 선포한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 실천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56. 목회자가 권위를 앞세워 다른 교역자나 신학생, 교회 직원들에게 군림하듯 행세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57. 영적 지도자로서 목회자는 일반 교인이나 사회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적, 도덕적 윤리의 실천이 요구된다. 그런데 오늘 목회자의 성적, 물질적 타락은 위험수위에 달하였다. 58. 땅에 떨어진 목회자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순결한 경건”(약 1:27)을 향한 영적 투쟁과 훈련밖에 없다. 59. 대접과 칭송을 받는 데 익숙해진 목회자의 체질을 섬김과 봉사에 익숙한 종의 체질로 바꾸어야 한다.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저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60.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8)
[ 감리교회 감독과 교단에 대하여 ] 61. 한국 감리교회의 머리는 감독(혹은 감독회장)이 아닌 그리스도이다. 감독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모든 교회와 성도를 섬기려는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 62. 그러나 지금의 감독직은 섬김의 자리가 아닌 지배와 누림의 자리가 되어버렸다. 63. 감독의 권위는 금배지와 보라색 비단 옷, 화려한 가운, 고급 승용차에 있지 아니하고 더욱 낮아진 자세로 교인을 대하는 겸비에서 나옴을 기억하라. 64. 돈이나 권력, 조직의 힘으로 당선된 감독에게서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65. 오늘 한국 감리교회는 3년째 해결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감독회장 문제로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이 모든 상황은 감독직에 대한 인간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66. 권력과 이익의 집중이 감독회장직을 탐하게 만들었고 감독직에 대한 욕심이 혼탁한 선거와 감리교 사태를 사회 법정에까지 가게 만들었다. 67. 감독회장직은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직책인가? 아니면 교회와 목회자, 교인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섬기는 직책인가? 68. 성경적인 감독의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딛 1:7-9) 69. 우리 감리교회 법이 규정한 감독회장은 어떠한가? “감독회장은 기독교대한감리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이며 행정수반으로서....”(교리와 장정 234단 제 133조) 오늘 우리에겐 행정수반보다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70. 참으로 감독은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깊은 영성과 윤리적 실천으로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71. 오늘 한국 감리교회 사태가 개인적, 집단적 욕심으로 인해 야기된 만큼, 지금부터라도 모든 당사자들이 욕심과 탐심을 버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하고 자숙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 72. 특히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적 탐심으로부터 벗어나 양보와 협력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73. 감리교는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체험에서 비롯된 ‘뜨거운 가슴’의 종교다. 그리스도 구속의 은총을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웨슬리의 믿음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74. 우리가 웨슬리의 후예라면, 웨슬리가 올더스게잇에서 신생의 은총을 체험한 직후 “나를 악의적으로 이용했거나 핍박했던 사람들을 위해 힘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75. 감리교회는 한 몸이다. 감독회장 문제를 비롯하여 목회자 수급문제, 은급문제, 신학교 문제, 미자립교회, 여성목회 문제 등 당면한 과제들을 풀기 위해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여하는 기도운동이 필요하다. 76. 이리 해도 안 되고, 저리 해도 되지 않는 오늘 한국 감리교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에 처한 한국 감리교회를 구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77. 이제 각자의 고집과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마음을 비운 채 하나님께만 지혜를 구하고, 그분의 뜻을 구해야 한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 신학교와 신학생에 대하여 ] 78. 신학교는 단순히 성경과 신학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고 수업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진리를 탐구하고 체험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79.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한다(잠 9:10). 과연 오늘 신학교 교수들과 신학생들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모하고 있는가? 80. 신학함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러한 신학은 하나님이 진노를 불러올 뿐이다. 81.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초월하시는, 초월적인 분이다. 그런 초월적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가르침을 받는 영적 훈련장소가 곧 신학교다. 82. 그런 영성 훈련을 위해 신학교의 예배와 기도 모임은 최우선적 관심과 배려 대상이 되어야 한다. 83. 과연 오늘 신학교 예배(채플) 시간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는 시간인가? 아니면 학점을 위해 억지로 참석해야 하는 수업시간인가? 84. 신학생들의 영성훈련이 교단에서 제정하여 지시한 강제적 학점 규정에 의해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음도 큰 문제이다. 85. 신학교의 영성훈련과 신학교육은 신학교수와 신학생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력으로 내실을 기해야 한다. 86. 신학교수는 교수이기 전에 목회자로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87. 신학교수는 모든 면에서 신학생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신학생들의 본이 되기 위해 신학교수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6) 88. 말이나 글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신학함의 본을 보이는 교수가 참 스승일 것이다. 89. 하나님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신학생은 신학수업과 영성훈련 모두에 충실해야한다. 특히 감신 학생이라면 경건과 학문과 실천이라는 우리 신학교 교육목표에 충실해야 한다. 90. 기도하고 성경을 읽지 않는 신학생들이여 회개하라. 영적 소양을 갖추지 않고 교회에서 어린 영혼들을 지도하는 막중한 사명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91. 공부하지 않는 신학생들이여 회개하라.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선배들은 이 동산에서 진리를 알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였다. 실력 없는 사역자가 되어 어디로 갈 것인가? 92. 신앙과 신학을 생활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신학생들이여 회개하라. 신학교 생활과 교회 생활, 가정생활이 서로 다른 위선적 삶을 살면서 누구를 지도할 것인가? 93. 신학생은 죄악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세상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하고 고발하기 전에 자기 안에 있는 악부터 버려야 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94. 신학생은 신학동산에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딤전 1:5)을 얻기 위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95. 우리는 이 모든 투쟁과 갱신, 변화와 개혁, 화개와 반성이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으로, 남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믿는다. 예수님께서 누룩으로 천국을 비유하신 것처럼 말이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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